주일낮예배 2017-05-07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태복음 11장 25-30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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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05-07
2017′경향의 강단(21) (2017년 5월 7일 / 어린이주일 대예배)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태복음 11장 25-30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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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태복음 11장 25-30절/ 석기현 담임목사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라는 소설은 작가인 생텍쥐페리 자신이 비행기를 몰고 가다가 사막 한가운데에 불시착을 하게 되면서 시작됩니다.
  거기서 그는 고장 난 비행기를 수리하고 있던 중에 어떤 먼 별에서 지구를 찾아온 ‘어린 왕자’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그 첫 대면은 이렇게 진행됩니다.
  생텍쥐페리가 비행기의 엔진을 고쳐 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그를 부르면서 “아저씨, 나 양 한 마리만 그려 줘.”라고 부탁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사막 한가운데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생텍쥐페리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 ‘어린 왕자’가 서 있었던 것입니다.
  ‘어린 왕자’가 초면에 그런 생뚱맞은 부탁을 한 이유는 그가 떠나온 작은 별에 남겨 놓고 온 양이 그리워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생텍쥐페리는 일손을 멈추고 양을 한 마리 그리기 시작했는데, 몇 장을 그려도 ‘어린 왕자’는 그때마다 퇴짜를 놓습니다.
  ‘이 양은 병들어 보여.’, ‘이건 양이 아니야, 뿔이 달려 있잖아.’, ‘너무 늙었어.’ 등등의 이유를 달면서 다시 그려 달라고 떼를 쓰는 것입니다.
  생텍쥐페리는 너무나 까다롭게 구는 ‘어린 왕자’의 요청에 지친 나머지 나중에는 그냥 ‘동그란 구멍이 두어 개 뚫려 있는 나무 상자’ 하나를 대충 끄적거려 놓고는 “네가 갖고 싶어 하는 양은 이 속에 있어.”라고 둘러댑니다.
  하지만 물론 그 그림에는 양의 모습이란 흔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린 왕자’는 그 그림을 받아들자마자 “이게 바로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이야.”라고 하면서 얼굴이 환해집니다.
  그리고는 그 그림의 상자에 있는 구멍을 들여다보면서 “양이 자고 있네.”라고 하며 아주 만족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어른이라면 열이면 열 다 ‘상자를 그린 그림’을 보고 그 속에 들어 있는 ‘양’을 볼 수 있을 리가 만무하지만, 순진한 어린이의 눈과 마음은 그처럼 어른이 볼 수 없는 세계까지 보고 느낄 줄 압니다.
  생텍쥐페리는 이런 식으로 ‘어린이’만이 소유하고 발휘할 수 있는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감성을 ‘어린 왕자’를 통해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 예수님께서도 그처럼 오직 ‘어린이만 볼 수 있는 것’이 영적인 세계에서는 더욱 확실히 존재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어린아이에게만 나타내신 것’ 즉 ‘어른의 마음으로는 절대로 깨달을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천명하신 것입니다.
  바로 25절과 26절에 “25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사용하고 계시는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라는 명칭은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그러면서도 ‘당신의 자녀에게는 지극히 인자하신 성부’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동시에 나타내는 아주 독특한 칭호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높고 위대하시면서도 사랑과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숨기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묘하시고도 무한하신 속성’은 그런 분야를 전공하고 있다는 신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 가장 잘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고, 오히려 깊고 어려운 것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훨씬 더 쉽고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른에 비해서 지식이나 경험은 물론이요 사물에 대한 인식과 현상에 대한 분석 능력 자체가 아예 상대도 되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더 잘, 더 쉽게 알 수 있겠습니까?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저는 이 오묘한 예수님의 교훈을 통해 우리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를 믿고 따르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왜 반드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어린아이는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계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27절 말씀에 “27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라는 말씀에서 ‘모든 것’이란 특히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신자’들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17장 6절에 예수님께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라고 기도하신 대로, 성부 하나님께서는 ‘택자’를 성자 예수님께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성부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구원해 주기로 작정해 놓으신 자들을 오직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서만 당신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처럼 ‘성부 하나님을 아는 그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기” 때문인데, 이것은 곧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심을 천명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란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것을 조금 더 쉽게 번역하자면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해 주려고 택한 자’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선택해 주신 자’만이 하나님을 알고 그 자녀가 될 수 있다는 뜻인 것입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어린아이의 마음’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어린이는 ‘자기 지식’이 아직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이 가르쳐 주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어른은 이미 자기만의 판단력과 논리가 있으며 게다가 그 마음속에 선입견이나 고집까지 이미 들어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가르쳐 주는 것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일단 의심을 해 보고 검증의 단계부터 거치기 마련입니다.

  그런 까닭에 어른일수록 ‘예수님께서 계시해 주시는 그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른이 가지고 있는 자기 나름대로의 세상 지혜와 인생 경험은 하나님을 아는 데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거치는 돌’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린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좀 배웠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자동적으로 가지게 되는 의심도 없고, 좀 머리가 커졌다는 성인일수록 교만하게 나타내는 거부반응 같은 것도 어린이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아는 가장 좋은 길, 가장 빠른 길,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내가 이해가 되어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며, ‘내가 공감이 되어서’ 믿을 수 있는 분도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인간의 지각의 대상도 될 수 없는 하나님은 오로지 예수님께서 당신의 택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시려고 ‘선포하시는 계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나타나게’ 되는 분이신 것입니다.

  사실 자녀가 부모를 인식하게 되는 것도 그와 똑같지 않습니까?
  부모는 자녀가 아주 어릴 때부터 그를 품에 안고 ‘아빠, 엄마’라고 가르칩니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이지만, 어린아이는 그런 부모의 말을 아무 의심 없이, 아무 증명도 요구하지 않고 그대로 믿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알게 되고 믿게 된 아버지나 어머니가 가짜 부모이겠습니까?
  어릴 때부터 그 아이에게 자기가 아버지라고, 어머니라고 가르쳐 준 그 사람만이 틀림없는 그 아이의 아버지요 어머니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 지식인일수록 ‘신의 존재’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무슨 도를 많이 닦은 사람만이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화육강세하신 성자께서 성부 하나님에 대하여 증거해 주시는 말씀을 오직 ‘어린아이와 같이’ 무슨 의심은커녕 망설임조차 없이 그대로 믿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아주 간단하면서도 더없이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소유하고 있는 깊은 지식이나 많은 경험 따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어린아이처럼 ‘성자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자만이 진정 ‘하나님을 아는 그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꼭 깨닫고 또한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어린아이는 ‘하나님께서 불러 주시는 초청을 그대로 영접하는 자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28절 이하 30절에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란 그야말로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물론 여기서는 ‘육체노동으로 인하여 지쳐서 힘들어 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다 본래부터 지고 있는 ‘죄의 짐’이야말로 각자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무겁고 힘들고 괴로운’ 것임을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무거운 죄 짐을 진 자들을 그저 “내게로 오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 초청을 듣고 주님 앞으로 오기만 하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27절 상반절에서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나타났듯이 택자 구원에 관한 전권을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으신 성자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즉 모든 것을 다 갖추어 완벽하게 준비해 놓으신 가운데 그저 ‘당신의 부르심에 응하기만 하면’ 그 모든 것을 다 베풀어 주시겠다는, 실로 은혜로운 초청인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다 또 금상첨화와 같은 사실은 그처럼 죄인을 불러 주시는 주님께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성품의 소유자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죽을 죄인을 살려 주시는 엄청난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니까 우리를 향해서 엄하고 두려운 ‘고자세’를 취하시더라도 지극히 당연한 일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세주께서는 그 어떤 권리행사도 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눈곱만큼의 권위적인 자세도 취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당신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못 박혀 죽기까지 하셨으면서도 오히려 죄인에게 그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만 보여 주시며 부르고 계시니 이 얼마나 고맙고도 황공무지하기 짝이 없는 부르심이겠습니까?

  정말이지 죄인 쪽에서는 부담될 것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초청임에도 불구하고 ‘어른’에게는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아주 어려운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어른은 남에게 의지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 마련이며 일단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해 본 후에 그래도 안 되면 도움을 청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어른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에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까지도 무슨 ‘자존심 상하는 일’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즉 뭔가 자기 쪽에서도 어떤 ‘선행’이나 최소한의 ‘공로’ 정도는 내밀 수 있어야 구원을 받을 만한 체면치레가 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혹은 아예 그런 ‘구원’ 따위는 전혀 필요 없으니 그저 ‘육신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자기가 필요한 대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요구하고 나오는, 정말 ‘간 큰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이는 ‘자기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항상 ‘어른에게 자연스럽게 의존’합니다.
  사실 어린이는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조차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자기보다 부모가 더 잘 알고 교사가 더 세심하게 보살펴 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즉 어린이는 그저 자기를 사랑하고 보살펴 주는 어른을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을 지키게 되며 사고의 위험으로부터도 안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런 ‘어린이의 자세’로써 주님의 고마우신 초청에 그저 전적으로 의지하고 자신을 내맡기는 것뿐입니다.
  아버지가 학교 앞에서 기다렸다가 수업이 끝나고 나오는 아들이나 딸에게 “오늘 아빠하고 어디 좀 들렀다가 가자.”라고 할 때 “아빠, 싫어요!”라고 거부할 자녀가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모르는 사람이라면 무슨 맛있는 것이나 선물을 사 준다고 해도 절대로 따라가지 않겠지만, 자기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면 그야말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아버지가 가자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반드시 무언가 ‘좋은 일’이 벌어질 것을 그 아들딸은 철석같이 믿고 있으며 또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구세주’로 믿고 그 분께서 ‘내게로 오라’고 부르시는 초청에 어린아이같이 기꺼이 영접하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 주님을 오로지 전적으로 믿고 따라가기만 하면 ‘율법의 멍에’ 즉 죄인으로서는 정말 수고롭고 무거웠던 짐을 다 벗어버리고 ‘우리 마음이 쉼을 얻게’ 됩니다.
  이전에 우리를 옭아매고 있던 ‘저주의 멍에’ 즉 사형선고 받은 죄인에게 가장 두렵고 고통스러웠던 멍에가 한순간에 벗겨지는 것입니다.
  그런 ‘율법의 멍에’에 비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지워 주시는 ‘자기 십자가의 멍에’는 정말이지 ‘쉽고 가벼운’ 것일 뿐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멍에는 그저 ‘즐겁고 복된’ 멍에일 뿐이며, ‘구원의 확신에서 오는 내적 평안’은 그 십자가의 멍에를 오로지 ‘감사함으로 기꺼이 지고’ 가게 해 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선함’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만 의지하고, 자기 쪽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고 오직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 대속을 통하여 죄인을 불러 주시는 이 고마운 구원의 초청을 오직 ‘어린아이의 자세’로써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주님의 품에 안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26절 말씀에 “26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나타내실 때에 오직 ‘어린아이의 마음’을 통해서만 그것을 볼 수 있고 또한 ‘오직 어린아이의 자세’를 통해서만 그것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 놓으신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도 전적으로 찬성하시고 완전히 공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지극히 높으심과 무한히 인자하심을 오직 ‘어린아이들에게만 나타내시려고’ 애당초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오직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만 ‘예수님의 화육강세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똑똑하게 볼 수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어른들 역시 ‘어린아이와 같이 순종하는 자세’를 나타내어야만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죄인을 불러 주시는 구원의 초청’에 응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자로 하여금 당신을 ‘알게’ 하시고 ‘사랑으로 교제하는’ 관계를 유지하게 해 주시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왜 경향교회의 모든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다 제게는 한없이 사랑스럽고 귀엽기 한이 없겠습니까?
  그 아이들은 “이 분이 담임목사님이야.”라고 곁에서 누가 말해 주면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저를 알려 주는 말을 듣고도 “정말 경향교회 담임목사님이세요?”라고 되묻거나, 혹은 노회에서 확인 서류를 떼어 오라고 요구하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페북에서 ‘친구 허락’을 해 주기 전에 먼저 상대방의 정보란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스팩들을 꼼꼼히 ‘재어 본’ 후에 결정하는 ‘어른’들과는 너무나 딴판인 것입니다.

  제가 목양실 근처 복도에 있다가 지나가는 주일학교 어린이를 부르면서 “이리 따라오세요.”라고 하면, 그 어린이는 영락없이 제 뒤를 졸졸 따라옵니다.
  도대체 왜 자기를 부르는지, 자기를 어디로 데려가려는지,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그냥 저의 ‘초청’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저를 무슨 ‘유괴범’이 아니라 ‘좋은 목사님’이라고 믿고 목양실 안에까지 따라온 어린이들은 어김없이 맛있는 ‘화이트 초콜릿’을 받아가게 됩니다.
  친구나 직장 동료들로부터 무슨 파티에 초청을 받아도 거기에 가면 정말 재미가 있을지 없을지,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더 나을지 아닐지 따위를 ‘계산’해 보거나, 심지어 상대방의 초청에 무슨 숨은 꿍꿍이가 있는지 ‘의심’까지 하는 ‘어른’들과는 그야말로 차원이 다르지 않습니까?
  바로 그처럼 순전한 마음으로 저를 ‘알고’ 그처럼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저를 ‘따라오는’ 아이들인 까닭에 제게는 그런 경향교회의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또 그런 어린이들과 만나는 것이 그처럼 즐겁고 행복한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저와 여러분이 바로 이런 모습으로 당신 앞에 나아오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참 하나님 되심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 주시면서, 그 계시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어린아이의 순진한 마음’으로 그대로 믿는 자를 지극히 사랑스럽게 보십니다.
  성부께서는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의 십자가 대속을 통하여 죄인이 용서함을 받고 영원한 구원의 쉼을 얻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어 놓으신 가운데, 아무 계산하는 것이나 재어 보는 것 없이 그저 ‘어린아이의 의지하는 자세’로 그 주님의 품으로 달려와서 그냥 안기는 자를 정말 기쁘게 반기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은 ‘세상의 지혜 있고 슬기 있다고 자부하는 어른’에게는 오히려 숨겨진 것이며, 오직 ‘어린아이에게만 나타내신 구원의 진리’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경향의 어린이들과 성도들이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그의 자녀’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초청’를 통하여 ‘영생구원을 누리는 택자’들이 꼭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