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4-30 “내가 너를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사도행전 22장 17-29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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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04-30
2017′경향의 강단(20)(2017년 4월 30일 / 주일 대예배)
“내가 너를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사도행전 22장 17-29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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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사도행전 22장 17-29절/ 석기현 담임목사
영어에 ‘master plan’(마스터 플랜)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말로는 ‘전체 계획’ 혹은 ‘종합 계획’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문자 그대로 ‘일의 시작부터 마침까지의 모든 과정에 대한 완벽한 계획’을 가리킵니다.
  이런 ‘마스터 플랜’이 없이는 그 어떤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으며, 특히 중요한 대사나 오래 걸리는 큰 기획을 차질 없이 진행해 갈 수가 없습니다.
  대형토목공사나 장기간의 경제정책 등을 시행함에 있어서 이런 ‘마스터 플랜’, 즉 모든 일을 멀리 내다보면서 세부사항까지 치밀하게 준비하며 계획을 먼저 세우는 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부르셨을 때에도 바로 그런 ‘마스터 플랜’을 이미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의 남은 생애를 어떤 식으로 이끌어 가실지에 대하여 바울의 회심이 있기 전부터, 아니 만세 전에 그를 선택하셨을 때부터 이미 그 자세한 계획을 세워 놓으셨던 것인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납니다.

  본문 사건의 배경은 제3차 전도여행을 떠났던 사도 바울이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행 21:27)의 선동에 의하여 ‘율법을 모독하고 성전을 더럽힌 자’로 몰려 죽기 일보직전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하지만 때마침 예루살렘을 지키고 있던 로마군대의 천부장이 그 소란의 소식을 듣고 현장에 출동하게 되었고, 확실한 진상을 알 수 없었던 천부장은 일단 바울을 결박한 후에 그를 영내로 데려가게 합니다.
  비록 ‘용의자’ 신분이 되기는 했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신변의 보호를 받게 된 사도 바울은 그 상황을 전도의 기회로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즉 로마군대의 병영 안으로 올라가는 층대 위에서 백성에게 “변명하는 말”(행 22:1)을 할 수 있도록 천부장의 허락을 받았던 것이었습니다.

  본문 앞의 2절부터 16절까지에서 바울은 우선 기독교를 그처럼 박해하던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찾아오셔서 변화시켜 주셨는지를 ‘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통해 유대인들 앞에서 간증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그 예수님께서 회심한 후의 자기를 어떤 새로운 인생길로 이끌어 가고 계시는지를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그 사도 바울의 간증을 통하여,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 각 신자의 전 인생에 대하여 그 얼마나 완벽하고 치밀한 ‘마스터 플랜’을 세워 놓으시고 인도하시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부르신 자를 어떤 일을 위해 쓰실 것인지를 미리 예정해 두시는 분이십니다.

  17절부터 21절에 기록하기를 “17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8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19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21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라는 말은 사도행전 9장 26절 이하의 사건이 있었던 때를 말합니다.
  그때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후 처음으로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자기를 여전히 두려워하는 기독신자들에게 자신이 완전히 바뀌어 새사람이 되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이하 28절과 29절에 있는 대로 바울은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는" 전도를 시작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그는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초대교회 신자들이 예배를 위한 처소는 따로 마련했지만 기도생활은 계속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했음을 보여 주는 단면이기도 합니다.

  하여튼 바울은 그렇게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즉 환상 중에 주님을 또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바울더러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즉 바울이 전도하는 말을 유대인들이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당시 바울이 회심한 직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목적 중의 하나가 곧 ‘유대인을 전도하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롬 10:1)고 뜨겁게 고백했듯이, 어찌하든지 자기 동족을 예수 믿는 신자로 만들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평생 동안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그처럼 진실한 심정은 바로 이 본문에서 지금 자기를 죽이려는 예루살렘의 군중들 앞에서조차 전도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첫 예루살렘 방문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예루살렘을 속히 떠나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그런 명령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자기야말로 유대인에게 전도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본문 19절과 20절에서 바울이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는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라고 예수님께 반문했습니다.
  즉 ‘기독신자를 그토록 박해했던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는 제가 갑자기 백팔십도로 바뀌어서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 유대인들이 더욱 호기심을 가지고 들을 것이고 쉽게 전도가 되지 않겠습니까?
 ’라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바울의 그와 같은 이의신청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재차 명하시면서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이방인 선교’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신 목적이었고 예수님께서 그를 사용하고자 하신 계획이었습니다.
  바울 자신은 동족인 유대인을 전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고 또 그 일에 스스로 가장 적격자라고 판단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그보다 더 큰 일, 더 멀리 가서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큰 사명을 주시기 위하여 그를 부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두고 세워 놓으신 목적에 따라 쓰이게 되었을 때 자기 자신이 판단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게 쓰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은 결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셔서 이 땅에 보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창조주께서 당신이 조성하신 피조물에 대한 전권을 다 보유하고 계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사야 44장 2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고 바로 그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지으신’ 까닭에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 하나님의 ‘종’으로서 쓰임 받는 것이 곧 우리 생의 존재 의의요 목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십니다.
  피조물이 스스로 자신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보다 창조주께서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에 대해 훨씬 더 자세하고도 정확하게 아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인생을 두고 이미 정해 놓으신 목적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위하여 세우는 계획보다 훨씬 차원이 높고 훨씬 멀리 내다보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고 순종하기만 하면 우리의 생은 본인이 기대했던 것보다 오히려 훨씬 더 크고 가치 있게 사용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 마음대로 내 인생을 산다.’는 것은 아주 멋있고 신나게 들리지만 그것이야말로 가장 저질적인 인생으로 치닫게 되는 지름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이란 곧 ‘타락한 본성에 사로잡힌 정욕’이며 그것은 사람을 ‘멸망하는 짐승’처럼 살게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에 대한 ‘버킷 리스트’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사는 사람들도 실상은 그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살고 있던 우리를 부르셔서 중생시켜 주심으로써 이제는 당신의 선한 일을 위해 사용될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바로 그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살아가야만 진정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특별한 피조물’로서의 가치를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생 받은 후의 새 삶을 그저 ‘먹고 사는 인생’으로 끝낸다는 것은 말도 될 수 없지 않습니까?
  오직 ‘나를 조성하시고’ ‘나를 불러 주신’ 하나님께서 미리 세워 놓으신 계획이 무엇인지를 찾고 바로 그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위해 자신의 남은 생애 전체를 기쁘게, 온전히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쓰실 자의 사역에 필요한 것까지 미리 준비해 두시는 분이십니다.

  22절 이하 29절에 “22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23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24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라 한대 25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26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냐 이는 로마 시민이라 하니 27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28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29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바울의 간증 전도는 그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군중들의 방해로 중단되었습니다.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즉 ‘예수님께서 나를 이방인 전도를 위해 세워 주셨다.’는 말이 바울의 입에서 떨어진 순간 그 군중들은 노기가 충천했습니다.
  그 말은 그저 ‘선민’이라는 자존심에만 가득 차서 이방인을 깔보고 혐오하고 있던 유대인의 심기를 자극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군중들은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렸다”고 했는데 그런 행동의 의미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옷을 벗어 던졌다는 것은 아마도 겉옷을 벗어서 머리 위에 치켜들고 흔들면서 선동하는 행위였던 것 같고, 티끌을 날린 것은 지금 로마 군병들이 호위하고 있는 바울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어서 그 대신 흙을 집어 던진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간에 사태가 또 소란스럽게 되자 천부장은 바울을 “영내”로 즉 로마 병영 안으로 완전히 끌어넣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라”고 군병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채찍이란 가죽 줄에 뼛조각이나 쇳조각을 박은 것으로서, 그것을 맞는 사람의 피부를 찢는 실로 고통스럽고 끔찍한 체형 도구였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히브리 방언’으로 유대인들에게 연설했기 때문에 천부장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고, 그래서 도대체 무슨 연유로 바울이 이런 소동의 원인이 되었는지를 심문하려 했던 것입니다.

  로마 군병들이 가죽 줄로 자신을 매자 즉시 사태를 파악하게 된 바울은 곧바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카드를 사용했습니다.
  자기가 “로마 시민”임을 밝히면서 로마 시민에게 재판도 없이 그런 체형을 가하는 것은 위법이라고 항의를 제기했던 것입니다.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었지만, 당시 로마제국 산하에서는 유죄로 확정되지 않은 로마 시민에게 태형을 가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고 구금조차 함부로 할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로마 시민인 것을 어떤 식으로 증명했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어떤 사람이 스스로 로마 시민이라고 주장하면 그 체포와 구금의 절차가 일반 다른 사람들과는 아주 달랐던 것입니다.

  바울에 대한 심문을 맡고 있던 백부장은 곧 자기 상관인 천부장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놀라서 당장 달려온 천부장은 자기가 직접 바울에게 그 주장의 진위를 물었습니다.
  바울이 천부장에게도 역시 “그러하다”라고 재차 주장하자 천부장은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다”라고 바울에게 말했는데, 이것은 약간 자조적인 어감이 들어 있는 말입니다.
  그 당시에는 아무나 돈만 좀 있으면 관리들에게 뇌물을 써서 로마 시민권을 얻는 것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또 그런 까닭에 그 가치도 떨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천부장에게 바울은 “나는 나면서부터라”고 응수했는데,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돈으로 시민권을 사는 것은 원래부터 시민권자로 태어나는 것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열등한 처지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던 바울이 어떻게 출생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집안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고 헬라 사회에 정착해 살고 있었으니만큼, 아마 부모가 로마 시민권을 먼저 취득한 후에 바울은 시민권자의 자녀로서 그것을 물려받았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하여튼 바울의 로마시민권을 의심할 수 없게 된 천부장은 바울을 심문하려던 것을 당장 멈추게 했으며, 자기가 로마 시민을 “결박한 것”이 상부에 보고되어 벌을 받게 되지 않을까 하고 오히려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에게 있어서 로마 시민권은, 마치 옛날 암행어사의 마패와 같이 그의 전도 사역 중 결정적인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장의 카드처럼 쓰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로 태어났다는 것은 그가 당시 헬라 로마 사회에서 상류 계급에 속한 집안 출신이었음을 뜻하며 그런 까닭에 또한 바울은 당대 최고 수준의 교육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바울의 그 학벌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용되었더라면 그는 기껏해야 좀 유명한 랍비 정도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바울을 부르시고 그의 그 박식한 학문을 사용하셨을 때, 그는 당대 세계 최고였던 헬라 철학자들과 상대하면서 복음을 선포했고 유대주의자들의 고질적인 율법주의 이단의 정체를 드러나게 했습니다.
  바울의 로마 시민권이 자기 혼자만을 위해 사용되었더라면 그것은 그저 당시의 상류사회에서 귀족처럼 사는 데에만 편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시민권을 ‘이방 지역’ 즉 온 헬라로마 사회를 활보하면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특권으로 이용되게 하셨습니다.
  바울이 길리기아 다소에서 막 갓난아기로 태어났던 바로 그 순간부터 하나님께서는 몇 십 년 후에 시작될 그의 복음전파 사역을 위해 그처럼 완벽하게 미리 준비해 두고 계셨던 것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이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국가에서 평화시대를 누리면서 살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저 제3세계의 가난한 국가나 바로 이웃에 있는 북한에서 사는 것과 비교할 때 그 얼마나 특권적인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만약 우리가 이런 특권을 그저 자기 개인의 행복을 마음껏 영위하는 데에만 사용한다면 정말 몰염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산국가나 이슬람국가에 비해 우리나라는 전도하기에 그 얼마나 자유로운 나라입니까?
  ‘팍스 로마나’를 선교에 선용했던 사도 바울에 비해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이야말로 세계 선교에 그야말로 완벽한 기회와 조건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꼭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학벌을 주셨으면 그것을 복음 진리를 정확하게 전파하는 데에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자가용 자동차를 주셨으면 그것을 가지고 부지런히 주중의 예배와 기도회에까지 나올 뿐 아니라 다른 교우들의 예배 참석을 도와주는 일에도 효과적으로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넉넉한 물질을 주셨으면 땅끝까지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는 일에 꼭 선용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당신의 선한 일을 위해 쓰라고 미리 준비해 주신 것을 나 혼자만을 위해 다 써버린다면 그야말로 최고의 철면피 인생으로 끝나고 말 것이지만, 바로 그 원래의 목적으로 사용하면 우리의 생애는 그야말로 극대의 효과를 올리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온갖 좋은 것들은 결코 나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구속사 완성을 위하여 효과적으로 사용하시기 위하여 친히 미리 준비해 두신 것임을 꼭 깨닫고 명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도 자기 자신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다 계획하고 준비해 주는 일들이 있습니다.
  외국에 여행을 갈 때 여행사에서 모든 일정과 관광지를 미리 계획해 놓고 교통편과 숙박 시설, 그리고 안내원까지 마련해 둡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생전 처음 가는 낯선 곳,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여행을 제대로 할 도리가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담임교사가 학생들의 교과 과정을 미리 계획해 두고 학교에서는 필요한 모든 시설과 비품과 교재들을 준비해 둡니다.
  그렇게 잘 계획되고 준비되어 있는 줄 아는 까닭에 부모들은 안심하고 자기 자녀들의 교육을 그 학교와 교사에게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오직 주님 편에서 만세 전에 이미 우리를 예정해 놓으시고 때가 되매 찾아와 주심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남은 삶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미리 계획해 놓으시고 이미 준비해 놓으신 대로 인도해 주심으로써 제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실로 놀랍고도 멋있는 생애가 중생 받은 성도에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성도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불러 주신 목적은 아직 믿지 않는 다른 사람을 더 불러 모으는 일을 위하여 사용하시고자 함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라면 방법이나 정도는 다르다 할지라도 누구나 다 전도와 선교의 사명에 자기의 남은 생을 사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또한 어떻게 살고 있든지 간에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은 성도의 인생에 주어진 것들은 그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령 사업에 선하게 쓰시고자 미리 준비해 두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는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과 환경과 힘과 물질과 재능들을 자신이 즐기는 목적으로만 쓰지 않고 반드시 전도와 선교를 위해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애를 이처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바에 따르고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것을 올바로 사용하면서 살아 갈 때, 저와 여러분의 인생은 스스로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일에 쓰이며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이방에 보내시기 위하여 계획하고 준비하셨던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전 인생을 위하여서도 미리 ‘마스터 플랜’을 마련해 놓으신 줄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주신 최고와 전부’를 기꺼이 바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