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4-16 “주께 부르짖어, 뛰어나게 하셨나이다” 시편 22편 1-5절, 45편 1-7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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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04-16
2017′경향의 강단(18) (2017년 4월 16일 / 부활주일 대예배)
“주께 부르짖어, 뛰어나게 하셨나이다” 시편 22편 1-5절, 45편 1-7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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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 부르짖어, 뛰어나게 하셨나이다"

시편 22편 1-5절, 45편 1-7절/ 석기현 담임목사
아마 영어 문화의 영향 때문이겠지만 이제는 우리나라 사회에서도 ‘역할 모델’(role model)이라는 말이 익숙해졌습니다.
  ‘어떤 한 사람을 표본으로 정해 놓고 자신이 그 수준에 이를 때까지 모델로 삼는 것’을 두고 그런 용어를 쓰게 되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모범’이라는 단어와 그 의미에 있어서 그리 큰 차이는 없어 보입니다.
  기독신자에게 있어서 그런 ‘역할 모델’이나 ‘모범’의 대상이란 두말할 것 없이 예수님이십니다.
  사실 각 신자는 그처럼 예수님을 본받아 성화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고’ 결국 ‘예수님과 같은 형상으로 화하는’ 단계 즉 ‘영화’라는 최고의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우리가 그처럼 예수님을 자신의 ‘역할 모델’로, ‘모범’으로 삼고 따라가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 열매’가 있으면 그와 똑같은 ‘다른 열매’들이 뒤따라 맺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서 ‘부활’이라는 최고의 열매를 맺게 되셨는지를 알아야 우리 역시 그 모습을 본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 시편에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들이 자주 나타나는데, 시편 22편과 45편은 바로 이 점에 대해서 실로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부활주일에 저는 이 시편의 본문들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해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는지를 살펴보면서 우리 기독신자들이 본받고 따라가야 할 모범으로 삼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끝까지 의지하면 반드시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22편 1절부터 5절에 “1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영화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상태에서 저 유명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시며 절규하시는 장면이 아주 실감나게 묘사됩니다.
  그때 십자가 밑에서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지금 저 사람이 엘리야를 찾는구나.”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는 곤경에 빠졌을 때 엘리야에게 구원을 청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미신적인 생각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무식한 군중’들과는 달리 구약 성경에 박식한 어떤 랍비가 “아니야, 저 예수는 지금 구약 시편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어.”하면서 “저렇게 끔찍한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성경 말씀을 생각해 내다니...”라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랬습니다.
  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예수님께서 고통에 겨운 극심한 괴로움 가운데 외친 절규이기는 했지만, 결코 아무렇게나 입에서 나온 원망이나 저주가 아니라, 구약 성경의 한 구절을 단어 하나하나까지 정확하게 외치신 것이었습니다.
  그 인용하신 말씀이 바로 본문 시편 22편 1절에 기록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구절입니다.

  사실상 이 시편 22편은 1절뿐 아니라 31절까지 전체가 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적 내용입니다.
  즉 이 1절에서 시작된 문맥이 마지막 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셨을 때에는 비단 1절뿐 아니라 뒤에 이어진 말씀도 분명히 생각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전체 문맥을 살피지 않고 그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이 말만 가지고 예수님의 의도를 해석하려 하면, 예수님께서 그 당하시는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나 극심해서 하나님을 원망한 것처럼 되어 버릴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런 식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그들은, 예수님이 구약 성경을 읽다가 그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되었고 그래서 자기가 죄인 대속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면 하나님께서 뭔가 큰 기적을 베풀어 주실 줄로 예상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정작 모든 상황이 그런 기대와는 정반대로 흘러가면서 최악의 고통만 당하게 되니까, ‘하나님, 왜 나를 배반하셨습니까?’라고 외쳤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흑인들에게 무료 의술을 베풀었다고 해서 소위 ‘아프리카의 성자’라고 불리는 슈바이처 박사는 자유주의 신학자이기도 했는데, 그가 바로 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런 식으로 왜곡했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엄청난 육체적 고통을 당하신 것은 틀림없고, 온 세상 사람의 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몽땅 다 대신 감당하고 계시는 막중한 정신적 고통까지 겹쳐서 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신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런 고통에 대한 절규였을 뿐이지 결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나 의심은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은, 바로 이 시편 22편 1절 다음에 이어지는 문맥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시편 22편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면서도 또한 일차적으로는 다윗 자신이 당하고 있던 실제상황에서 터져 나온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즉 1절과 2절에서 다윗은 분명히 어떤 큰 환난과 고통을 당하는 가운데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습니까? ’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3절 이하에 보면 그런 비통한 절규 속에 내포되어 있는 다윗의 본심은 결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나 불신이 아니었음이 너무나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우선 3절에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비록 다윗 자신은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중에 있더라도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통해서도 오직 찬송만 받으셔야 마땅한 분이심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4절과 5절에 보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다윗처럼 그 어떤 큰 고통 중에서도 무조건 하나님만 “의뢰하고” 하나님께만 “부르짖으면” “수치”스러운 형편으로부터 “건져냄”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1절과 2절에서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친 절규는 결코 원망과 불신의 비명이 아니라, 하나님을 끝까지 의뢰하는 믿음을 가지고 그 구원을 요청하는 부르짖음일 뿐인 것입니다.
  다윗의 진짜 의도가 그러했다면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신 숨은 뜻도 역시 똑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문자 그대로 온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서 아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큰 고통을 당하시던 예수님께서는, 비록 그 입으로는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고 또 실제로 곡해하기도 하는 비통한 절규를 발하셨지만, 그 심령 속에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은 조금도 없고 오직 끝까지 성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만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성부 하나님은 성자로 하여금 비천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게 하신 분이시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그 ‘거룩하신’ 성부의 뜻과 행하시는 역사를 ‘찬송’하고 계셨습니다.
  사람이 보기에 그 성부 하나님은 지금 당신의 독생자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끔찍하기 짝이 없는 고통을 당하도록 내버려두고 계시는 매정한 아버지 같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지금 당신께서 당하고 계시는 십자가의 고통이 결코 ‘수치’로 끝나지 않고 끝내 ‘부활’이라는 놀라운 ‘구원’을 성취하게 만드실 것을 굳게 확신하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처럼 성부 하나님을 끝까지 의뢰함으로써 십자가의 고난까지 이겨내셨다면, 그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부르짖고 의뢰하는 자’를 그 모든 ‘신음과 수치’의 고난으로부터 반드시 ‘건져’ 주시는 분이심을 확신하고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이 은혜로운 ‘구원’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은 전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면 끝내 최고의 영광을 누리게 됨을 우리에게 증거해 줍니다.

  45편 1절부터 7절에 기록하기를 “1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2왕은 사람들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원히 복을 주시도다 3용사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4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왕의 위엄을 세우시고 병거에 오르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놀라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5왕의 화살은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 6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7왕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왕에게 부어 왕의 동료보다 뛰어나게 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교단은 올해부터 ‘개역개정’ 성경을 쓰게 되었는데, 이것은 가능한 한 성경을 ‘직역’함으로써 원문의 의미를 가감 없이 그대로 옮기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 역본입니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공동번역’이나 미국의 ‘NIV’처럼 ‘의역’을 사용한 성경을 보면 원문을 ‘읽기 쉬운 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자유주의적 신학이 곳곳에 반영되어 있고, 그 결과 평신도들은 두말할 것 없고 목사 중에서도 그 중대한 오역을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자유주의적 이단 사상에 절로 물들게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본문 역시 바로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구절입니다.

  이 시편 45편은 어떤 “고라 자손” 즉 레위인으로서 아마도 찬양대원이나 찬양대장이었던 사람이 지은 것으로서, 전체가 다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왕’에 대한 찬가인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메시아를 예언’하고 있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이 시편에서 대부분의 구절들이 다 ‘왕’을 찬양하고 있는 내용인데, 유독 6절만 갑자기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圭)는 공평한 규이니이다”라고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공평한 주권을 찬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이 개역개정 성경에 “주의 보좌” “주의 나라”라고 번역된 말은 원문으로는 그냥 ‘당신의 보좌’와 ‘당신의 나라’이지만 그 앞에 나오는 ‘하나님이여’라는 ‘호격’의 문맥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하지만 공동번역에 보면 이 6절이 “하느님의 영원한 옥좌에 앉으신 임금님”이라고 되어 있고 표준새번역에도 “하나님께서 임금님을 영원토록 보좌에 앉히셨으니”라고 번역해 두었습니다.
  즉 이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호격’으로 직역하지 않고 ‘이스라엘 왕을 수식하는’ 의미로 고쳐서 ‘의역’해 놓은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아마 이 시편 전체가 ‘왕’을 찬양하는 내용인데 이 6절에서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바뀌는 것이 문맥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야말로 그저 번역자의 판단에 뭔가 성경이 잘못되었다 싶으면 아무 근거도 없이 자기 멋대로 ‘의역’해 버리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버릇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례입니다.
  영어 성경의 경우를 보면 ‘KJV’이나 ‘ASV’ 같은 정통적인 역본은 물론이거니와 대표적으로 의역을 취한 ‘NIV’조차 이 부분만큼은 그냥 원문 그대로 ‘호격’으로 번역해 두었는데, 유독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은 이처럼 성경 말씀을 ‘의역’이 아니라 아예 ‘오역’을 해 버린 것입니다.

  이 구절을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개역개정처럼 “하나님이여”라고 직역해야 하는 이유는 우선 원문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며 또한 이 구절이 신약에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장 8절과 9절에 보면, 예수님이 천사보다 훨씬 우월하시다는 사실을 증명하면서 바로 이 시편 45편 6절과 7절을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인용하고 있는데, 거기에서도 본문의 말씀을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라고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스운 해프닝은, 시편에서는 이 구절을 마음대로 바꾸어 놓았던 공동번역이나 표준새번역이 그 구절을 인용해 놓은 히브리서에서는 다시 이 부분을 ‘하나님이여’라고 호격으로 번역해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즉 히브리서의 기자가 어느 ‘고라 자손’이 지은 시편 45편을 마치 그 원래의 의미와 다르게 인용한 것처럼 만들어 버린 셈인데, 물론 말도 안 될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편 45편 6절과 7절을 히브리서에서 인용된 그대로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염두에 두고 생각할 때,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우선 이 시편 기자가 다른 절에서는 “왕”을 찬양하는 노래를 하면서도 6절에 와서는 “주(하나님)의 보좌” “주의 나라”와 같은 표현을 쓰는 이유는, 참된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다 자기네 조국 이스라엘이 세상 나라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나라 즉 ‘신정국가’임을 늘 기억하고 있었고, 그런 신앙이 여기서 절로 반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이 예표하는 ‘교회’ 역시 오늘날 이 지상에 세워져 있는 ‘하나님의 왕국’임을 뚜렷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7절을 보면, “왕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왕에게 부어 왕의 동료보다 뛰어나게 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에 적용시켜 본다면, 다윗 같은 성군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공의로운 정치를 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기쁘게 여기시고 ‘왕의 동료’ 즉 주변국가의 그 어떤 왕들보다 다윗을 훨씬 더 ‘뛰어나게’ 높여주셨다는 뜻이 됩니다.
  진짜 훌륭한 왕은 자신의 능력이나 선전이나 무력으로써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준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여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그대로 보여 주신 모범이 아니었습니까?
  ‘왕 중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는’ 사명만을 철저히 수행하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스스로 높이시려고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셨을 뿐 아니라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겸손한 왕이셨으며 오직 성부의 뜻을 따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마 12:19-20) 구원사역만을 수행하셨습니다.
  그처럼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주’로서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으며” 그 결과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빌 2:9-10)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나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까지도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과 명하시는 사명을 준행하심으로써 진정 높아지셨다면, 애당초 높다고 할 아무 것도 없는 우리야 두말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 땅에서 이루기 위해 전 생애를 다 바치는 자를 지극히 높여 주시는 분이심을 깨닫고, 오직 이 예수님을 본받음으로써 영생이라는 최고의 영광까지 함께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그냥 ‘탄탄대로’를 ‘일사천리’로 순조롭게 달린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먼저 십자가에 달리시는 ‘최악의 수치와 고난’을 통과해야만 했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예수님께서는 오직 성부 하나님을 ‘의뢰하고 부르짖음’으로써 끝내 사망을 이기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무슨 개인의 ‘출세 의욕’을 따라서 끝내 ‘성공 신화’를 만들어낸 일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이 땅에서 이루시려는’ 자발적인 순종에 따른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성자를 ‘지극히 높여서’ 만물과 만인 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게 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교회의 많은 교인들은 오로지 그 반대로만 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지금 당장 좀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쉽게 불평과 원망을 내뱉습니다.
  세상 군주보다 훨씬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마치 최고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이것저것 해 달라고 온갖 요구부터 늘어놓는 것입니다.
  당신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의지할 줄 모르고 오히려 그 하나님을 자기의 심부름꾼이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은 실로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주객전도요 엄청난 신성모독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진정으로 본받고자 하는 성도라면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전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준행해야’만 이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예수님의 뒤를 제대로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오직 ‘주께 부르짖고’ 전 생애를 통해 ‘성부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끝내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그 어떤 인생의 고난을 당해도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자신의 생애 최고와 전부를 기꺼이 바침으로써 ‘구원’의 은혜와 ‘영생’의 영광에 꼭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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