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정사기념예배 2017-04-1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가복음 14장 12-21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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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정사(釘死)기념예배 2017-04-14
2017′경향의 강단(17) (2017년 4월 14일 / 금요정사기념예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가복음 14장 12-21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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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가복음 14장 12-21절/ 석기현 담임목사
사람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을 싫어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무엇을 ‘요구’하거나 ‘명령’을 내릴 때에 그 말을 고분고분 따른다든지 혹은 자기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야단’을 칠 때에 그런 소리를 달갑게 받아들이기란 아주 어렵습니다.
  특히 과거보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훨씬 더 강조되며 존중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이런 본능이 더욱 자극되는 바람에, 요즘의 젊은 세대는 군대에서 상급자의 명령에 반발하는 하극상이나 학교에서 자기를 훈계하는 선생님에게 오히려 폭력을 행사하는 천인공노할 행동까지 흔히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의 일반적인 본능을 거스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정말 사랑하거나 존경하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할 때입니다.
  대부분의 아버지는 자기 딸이 무엇을 해 달라고 말할 때 그것을 거절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그래서 ‘자녀 교육상 좋지 않은’ 줄을 잘 알면서도 그 소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일도 왕왕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는 말까지 달게 듣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짜 사나이’라는 프로에서도 자주 볼 수 있듯이, 평소에 존경심과 신뢰감이 깊이 쌓여 있던 교관이라면 그 교관이 불호령을 내릴 때에도 훈련병들은 그 말에 대해 반감을 품기는커녕 오히려 눈물을 글썽이면서 깊이 반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 가운데서도 ‘무슨 말이든지 들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 있지만, 예수님이야말로 그런 면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분이십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라면 몰라도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 때에 적어도 참된 기독신자라면 그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정사기념예배를 드리게 된 오늘밤에 저는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바로 전날 유월절을 지키셨던 다락방을 중심으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진정한 기독신자가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고 받아들여야 할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도는 예수님께서 어떤 요청을 하실 때에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순종해야 합니다.

  12절부터 16절에 기록하기를 “12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13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14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5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16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고 했습니다.

  고난주간의 목요일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게 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월절 만찬을 나눌 장소가 필요했지만, 예루살렘에는 예수님과 평소 친분이 두텁고 또 넓은 방이 있는 집을 가진 사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3년 공생애의 대부분을 보내셨던 갈릴리 지역이라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도 많았고 또 제자들의 친인척들도 있었을 터이니 그것이 별 문제가 안 되었겠지만, 예루살렘에서는 상황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난감해진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별 문제가 아니라는 식으로 그냥 예루살렘성에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인데 “그를 따라가서”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라고 당신께서 물으시더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즉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될 사람이 아니라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어떤 특정한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아주 상세하게 지시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의 집 주인과 예수님 사이에 어떤 특별한 친분 관계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어디에 사는 누구’라고 이름을 밝혀 주셨을 것이지, 이처럼 ‘물동이를 지고 가는 사람의 집 주인’이라고 마치 무작위로 선택한 대상처럼 말씀하지는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편에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성에 가서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인지 분명히 알고 계셨지만, 그 집 주인 편에서는 혹 예수님의 소문을 듣거나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수는 있어도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는 없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더러 그 집 주인을 만나면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즉 당신께서 아는 사람에게 미리 예약이나 해 놓으신 것처럼 말씀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이 그렇게 하기만 하면 그 집 주인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며칠 전에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를 구해 오던 경우와 비슷한, 즉 제자들로서는 좀 황당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따랐는데, 그 결과 그 집 주인은 자기 집의 다락방을 예수님과 제자들의 유월절 만찬 자리로 기꺼이 제공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그런 예수님의 말씀에 곧 이어서 그냥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고, 즉 그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아주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특별한 과정을 통해 의미 있는 장소를 제공한 그 ‘집 주인’에 대해서 성경은 끝내 그 이름을 밝히지는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그 장소가 바로 ‘마가의 다락방’ 즉 나중에 예루살렘교회의 모체가 되는 기도처로 사용되었던 그 다락방과 동일한 장소가 아니었을까라고 추측은 하지만 물론 확실히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그 다락방의 주인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보내어 그런 요청을 하셨을 때 흔쾌히 승낙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그가 평소부터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때까지는 예수님을 잘 모르다가 그 요청을 듣게 되는 순간 마음에 어떤 특별한 감동을 받아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여튼 그 집 주인은 이 일을 통해 예수님과 아주 밀접하면서도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된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가 정말 마가였다면 그는 바로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예수님과 특별한 친분을 나누고 나중에 초대교회의 중요한 인물로까지 성장할 수 있게 된 셈이었습니다.

  이 전 과정을 보면 그 집 주인 쪽의 어떤 자원하는 마음이나 자발적인 봉사를 통해서 그런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예수님 편에서 그에게 유월절 잔치를 위한 자리를 요청하심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그 집 주인의 편에서 보자면, 예수님께서 하고 많은 예루살렘 성의 사람들 중에서 그를 선택하시어 그의 집을 사용하겠다고 요청해 오신 자체가 결국 그 자신에게는 엄청난 특권이요 복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성도 역시 예수님께서 명하시는 일에 봉사하고 충성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부담스럽게 여기거나 손해라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사실은 그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 중에서 나를 지명하셔서 맡기시는 직분은 나 혼자만 더 힘들게 되는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께서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으시고 나를 특별히 선택하셔서 주신 특권적인 사명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장로와 집사들도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나 한 사람에게 어떤 특별헌금을 바치도록 명하시는 경우 역시 나만 남들보다 더 많이 고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소중한 기회를 통해서 나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예수님을 더 가까이 모시게 되고 더 각별한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니 그야말로 백에 하나, 천에 하나 뽑혀서 누리게 된 영광스러운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교회를 통해 어떤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회가 주어지거나 남보다 더 많이 충성해야 할 직분이 주어지는 것은 이처럼 목사가 시키는 일이 결코 아니라 바로 예수님께서 친히 나 한 사람을 마음에 두시고 지정하셔서 내려 주시는 아주 특권적인 복인 줄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오늘 너의 집에서 유월절을 지켜야 하겠다.’라는 예수님의 특별한 요청이 있을 때마다 조금이라도 부담을 가지거나 힘들게 여기지 말고 오직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도는 예수님께서 죄를 일깨워 주실 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17절 이하 21절에 “17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18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20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드디어 유월절 저녁, 오늘날로 치면 어제 목요일 저녁에 예수님께서는 앞서 보았던 대로 마련된 어느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찬을 나누시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식사 후에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밤새도록 기도하시다가 그 다음날 즉 금요일 새벽에 유다의 배반으로 인해 체포를 당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큰 괴로움과 고통을 당신의 마음속에 가득 안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곧 십자가를 지시고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고난을 당하셔야 할 엄청난 짐의 무거움 때문에 오는 것이기도 했지만, 또 한 가지 그런 고난의 길이 다른 사람 아닌 당신의 제자 중 한 사람의 배반으로 시작될 것이기 때문에 오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 최후의 만찬 도중에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고 그 괴로움을 토로하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나를 판다.’는 말도 그렇지만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판다.’는 말씀 속에는 실로 배신 중에서도 최악의 배신을 당하게 되시는 가슴 저린 고통이 깔려 있었습니다.
  ‘같이 먹는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동고동락하며 지극히 가까이 지내는 사이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유대 사회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배신하지 않아야 할 가까운 사람, 평소에 많은 은혜를 입었던 사람이 배신하는 경우를 두고 ‘한 상에서 먹던 사람이 배신을 했다.’, ‘내 떡을 먹던 친구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다윗의 시편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배신 역시 다른 사람 아닌 열두 제자, 그야말로 삼년 동안 예수님과 같이 먹고 같이 자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배우고 예수님의 사랑을 그 어떤 다른 사람들보다도 특별히 더 많이 받았던 바로 그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저질렀기 때문에, 우리 예수님의 고통도 그만큼 극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예언적인 선언은 그 자리에 있던 당사자 가룟 유다에게야 속이 뜨끔한 것이었겠지만 그를 제외한 나머지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는 그야말로 폭탄선언 그 자체였습니다.
  자기네 열두 명 중의 하나가 예수님을 배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실로 그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과연 우리 중에 그런 짓을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라고,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충격과 혼란의 와중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했던 말이 참 흥미롭습니다.
  19절에 보니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했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아니지요”라는 말은 우리가 이전에 사용했던 한글개역성경에는 “내니이까”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원문을 영어로 번역하면 ‘Surely not I?’라는 문장으로서 이 개역개정의 번역이 좀 더 정확합니다.
  즉 ‘내니이까’라는 번역은 마치 ‘예수님을 판다는 사람이 혹시 저입니까?’라는 의미로 오해될 수 있지만, 이 ‘나는 아니지요?’라는 번역이 ‘예수님을 팔게 될 사람이 저는 아니겠지요?’라는 원문의 뉘앙스를 그대로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다.’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이 ‘저는 아니지요? 그렇지요?’라고 말한 심정은 과연 어떤 것이겠습니까?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열한 제자들에게는 자기 스승을 배반할 생각이 꿈에도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 저는 절대로 아닙니다.”라고 자기의 결백을 자신만만하게 선언하지 않고, 그 대신에 “예수님, 설마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매우 조심스럽게 질문한 이면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겸손이 있었습니다.
  즉 이 말 속에는, 지금은 분명히 예수님을 배반할 뜻이 추호도 없다는 것을 자신의 양심으로써 잘 알고 있지만, 혹시 자기가 나중에라도 마음이 바뀌어서 정말 그런 배신자가 될 가망성도 있지 않나 하는 염려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자신의 연약을 스스로 인정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겸손한 마음은 ‘나는 절대로 예수님 배반할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자만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은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역시 예수님 앞에서 항상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바로 이런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경고하고 범죄에 대하여 책망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 될 것이며 아주 잘해야 ‘오십보백보’의 처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일하게 ‘죄와 아무 상관없으신’ 지극히 순결하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나의 무슨 잘못을 지적할 때는 수긍하기보다는 반감이 앞설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이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에 들지 말라.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해 주시면 오히려 그런 경고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고 그저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뿐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예수님, 나는 죽어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베드로처럼 큰소리를 탕탕치는 사람은 오히려 실족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만하면 적어도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아무 문제없는 사람이지.’라고 스스로 자신만만해 하는 것이야말로 실상 온전한 신앙에 최대의 걸림돌이 되는 교만이라는 덫에 이미 걸려 있는 꼴인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 저도 예수님의 배반자가 될 소지가 많은 연약한 자이기는 하지만, 설마 그렇게 되지는 않겠지요?’라고 자신을 한껏 낮추는 성도는 오히려 정작 시험을 당할 때에는 너끈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예수님은 바로 그처럼 겸손한 성도를 위해서는 그 ‘믿음 약한 것’까지 도와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정말 신실한 성도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자만하지 않습니다.
  정말 잘 믿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도 결코 방심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주의하게 되어 있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은 우리 신자에게도 정확하게 적용되는 철칙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다.’라고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일깨워 주실 때에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나 자신이 혹시 그 배반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겸손한 마음자세로 그 말씀을 달게 들음으로써 실족과 범죄에 결코 빠지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그 무명의 ‘집 주인’은 ‘선생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요청해 왔을 때 기꺼이 ‘다락방’을 제공하는 순종을 나타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시며 그들 가운데 배신자가 있을 것이라고 예고하셨을 때 ‘혹시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생면부지의 행인이 다짜고짜 방을 내 놓으라고 요구했다면 벌컥 화를 내었을 것이고, 만약 다른 랍비가 그런 예언을 했다면 ‘우리 제자들을 그렇게도 믿지 못하나?’하고 섭섭해 하면서 반감이 들었겠지만, 예수님께서 요구하시고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말씀인 까닭에 그들은 그렇게 순순히 따르고 달게 들을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판 알지도 못하는 사람’입니까?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그냥 좀 뛰어난 현인’입니까?
  만약 그렇게 생각된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할 리도 없고 예수님의 책망에 회개하지도 않을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그런 ‘다른 사람’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 당신의 생명까지 이미 먼저 내주신 분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쓸 일이 있다.’고 요구하시면 두말하지 않고 당장 우리의 ‘다락방’을 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예수님은 내 죄를 대속해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어린 양의 희생제물’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처럼 인자하신 ‘대제사장’께서 우리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경고해 주시면 우리는 그것이 곧 우리로 하여금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게 해 주시려는 지극히 고마운 말씀인 것을 깨달을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예수님께서 하시는 ‘명령’과 ‘책망’은 그 어떤 경우에도 즉각 ‘순종’과 ‘겸손’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한 것입니다.
  오늘 ‘정사기념예배’를 드리는 이 밤에 ‘선생님’으로, ‘구세주’로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명하시며 일깨워’ 주실 때에 그 말씀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따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자신의 심령 속에 깊이 새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