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4-09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마가복음 11장 12-14절, 13장 28-37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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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경향의 강단(16) (2017년 4월 9일 / 주일 대예배)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마가복음 11장 12-14절, 13장 28-37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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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마가복음 11장 12-14절, 13장 28-37절/ 석기현 담임목사
저는 무화과를 미국에서 우리나라로 돌아온 후에 생전 처음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어느 교인이 선물로 보내 주셨는데, 처음에는 어디 외국에서 수입한 것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땅끝마을’이라 불리는 해남 지방에서 무화과가 생산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잡수셨던 과일을 저도 직접 먹을 수 있게 되어 꽤 흥분했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달콤하고 식감도 좋고 아주 맛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일부 지역에서 키우기 시작한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사셨던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이것이 포도나무와 함께 가장 대표적인 과목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일이나 대상을 비유로 자주 사용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이 무화과나무를 사용한 교훈을 자주 베풀어 주셨는데, 본문에 나오는 대로 고난주간에만 해도 그런 일이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이제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오늘 종려주일에 저는 예수님께서 그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필수적인 열매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교회는 예수님의 구속사 완성을 위한 ‘구령의 열매’를 맺어야만 그 존재가치를 지킬 수 있습니다.

  11장 12절부터 14절에 “12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안식 후 첫날’에 해당되는 오늘 종려주일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이튿날” 즉 고난주간의 월요일에 있었던 사건들 중에 하나입니다.
  12절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께서는 어젯밤을 “베다니”에서 주무시고 오늘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셨는데, 그때 시장기를 느끼셨습니다.
  저도 아침밥맛이 좀 유별나게 좋고 아침밥을 든든히 먹어야 힘을 낼 수 있는 사람인데 어쩌면 예수님도 그런 분이셨는지 모릅니다.

  하여튼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침 멀리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발견하시고는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 보셨지만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봄이 되면 설익은 열매와 잎사귀가 함께 열리고 그 시기가 지나면 진짜 맛있는 무화과열매가 맺히게 되는데, 예수님의 고난주간은 시기적으로 볼 때 전자에 해당되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것을 모르실 리는 없었지만 매우 시장하셨던지라 그 설익은 열매라도 좀 얻을까 하고 다가가셨던 것인데, 그 무화과나무에는 그것마저 하나도 없이 그저 잎사귀만 무성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천만뜻밖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고 그 나무를 저주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언뜻 이해가 잘 안 되는 장면입니다.
  이런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은 아직 제철도 아닌 나무에 과일이 맺히지 않은 일을 두고 화를 내실만큼 ‘신경질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여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물론 그런 추리는 전적으로 부당합니다.
  예수님같이 완전한 인격의 소유자이신 분께서 과일나무 한 그루를 무슨 원수처럼 여기며 저주하실 분이 아니라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구약의 선지자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대로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행하신 ‘상징적 행위’로 깨달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바로 앞에 나오는 사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행위도 예수님께서 당신은 ‘군주와 같은 정복자로서의 메시아’가 아니라 ‘겸손히 섬기는 종으로서의 메시아’로 오신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행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마르게 하신 것 역시 제자들로 하여금 그 어떤 중대한 사실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함이었고, 그래서 14절 끝에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는 기록으로 이 사건을 일단락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런 행위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신 사실은 과연 무엇입니까?
  구약에서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함께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나무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그 같은 행위는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과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생활이란 것이 예수님의 구속사 성취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메시아를 반갑게 영접하고 그 구원사역에 제일 앞장서서 섬겨야 마땅한 선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의 복음운동에 쓰임이 될 만한 무슨 ‘설익은 열매’ 하나조차도 맺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결과 이스라엘 민족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저주의 예언 그대로 예루살렘 성전은 주후 70년경에 로마 군대에 의하여 철저히 파괴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와 동시에 ‘혈통적 의미에서의 이스라엘’은 나중에 20절에 나오듯이 영원히 사람들에게 아무 열매를 나누어 줄 수 없는 저주 받은 무화과나무처럼 “뿌리째 말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와 꼭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주관해 나가시는 이 위대한 구속사에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교회는 그 옛날 예루살렘 성전과 마찬가지로 말라버리고 결국 ‘찍어 불에 던지움’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 경향교회에 직접 찾아오셔서 시장하다고 하시면서 무슨 ‘먹다 남은 찬밥’이라도 좋으니 좀 달라고 하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그 예수님께 감히 찬밥을 내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찬밥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고 황송해 어쩔 줄을 모르면서 당장 밥을 새로 짓든지, 아니면 근처의 고급 식당으로 모셔 가든지, 하여튼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으로 대접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그렇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바로 당신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에서 정말 ‘설익은 열매’라도 지금 당장 당신께 필요하시다고 찾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고 있다면, 교회가 바로 예수님의 몸이요 그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소중한 공동체라는 사실을 진정 의식하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우리 경향교회를 향하여 ‘설익은 열매’라도 좀 달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그 얼마나 황송스러운 말씀인지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내 신앙 경력이 짧아서 어쩔 수 없이 열매를 못 맺지만 앞으로 더 자라게 되면 풍성하게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핑계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가난해서 어렵지만 내가 경제적으로 더 많은 복을 받게 되면 그때 가서는 열매도 좀 내놓을 수 있겠다고 마음대로 계산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신앙 연륜이 짧은 것이나 능력이 약한 것 따위를 핑계로 삼아 ‘설익은 열매’조차 내놓을 생각을 하지 않으면 그 다음에는 실로 두려운 결과가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초기에 ‘설익은 열매’조차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제때가 될 때 ‘잘 익은 열매’를 내어놓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사업을 할 때에도 장사가 안 되는 상점이라면 일찍 문을 닫는 것이 더 낫고, 이윤을 남기지 못하는 지점이라면 프랜차이즈 권리를 회수하고 폐점시키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무 열매가 없는 기업에 돈과 인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같은 체인스토어의 간판을 걸어 놓게 하는 것조차 그 전체 프랜차이즈에 오히려 손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운영하시는 방법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땅끝까지 이르러야 할 전도와 선교 사역에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교회, 오히려 교회라는 이름이 달려 있는 자체가 불명예스러운 교회를 남겨 두실 이유가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뿐입니다.
  즉 ‘구령의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교회는 결국 ‘뿌리째 마르는 무화과나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쓸모가 있는’ 교회를 더욱 축복해 주십니다.
  그저 신앙 경력만 요란하고 교회에 다닌 햇수만 ‘잎사귀처럼 무성하면서’ 실제로 주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내어놓을 줄 모르는 교인들만 가득 모여 있는 교회를 여러분이 예수님이라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축복해 주시겠습니까?
  자신의 현재의 형편과 처지가 어떠하든지 간에 지금 주님께서 당신의 구속사 완성을 위해 당장 필요하다고 요구하실 때에 비록 ‘설익은 열매’라 할지라도 기꺼이 바침으로써, 이 경향교회를 통해 앞으로 ‘훨씬 잘 익은 구령의 열매’를 더 많이 함께 생산해 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도는 재림하실 예수님 앞에서 ‘신행일치의 열매’를 보여 드려야만 영화(榮化)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13장 28절 이하 37절에 “28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29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0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31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2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34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문단은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3장을 통해 선포해 주신 설교 내용의 주제를 요약 정리해 주시는 결론에 해당됩니다.
  즉 13장 전체는 곧 종말에 일어날 징조들과 그에 대한 성도들의 자세에 관한 것인데, 이제 설교를 맺으시면서 마지막으로 그 요점을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제자들의 머릿속 깊이 꼭꼭 새겨지도록 강조해 주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계절에 따라 잎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낙엽수’의 일종이기 때문에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본격적으로 열매를 딸 수 있는 “여름이 가까운 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29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즉 예수님께서 27절 이전까지 일러 주신 여러 가지 말세의 징조들을 보게 되면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즉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줄을 알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날과 그 때”는 천사는 물론이고 성자 예수님조차 알 수 없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즉 세상 종말과 예수님 재림이 일어날 ‘정확한 때’는 성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앞에서는 온갖 ‘말세의 징조’들만 자세히 살피고 있으면 당신의 ‘재림’의 때도 미리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아버지만 아신다.’라고 하시니 이것은 예수님께서 갑자기 말을 바꾸신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물론 예수님께서 모순이 되는 말씀을 하실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일깨워 주려 하시는 사실은 ‘재림의 정확한 시간’이 아니라 ‘임박한 재림을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할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30절만 보아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고 천명하셨습니다.
  즉 27절 이전까지에서 일러 주신 온갖 ‘말세의 징조’들이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의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다 나타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온갖 ‘천재지변의 재난’과 ‘교회와 성도에 대한 박해’와 ‘적그리스도와 이단의 출현’ 등의 징조들은 어느 특별한 시대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인류역사를 통틀어서 항상 있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요점은 각 개인에게 있어서는 그 본인이 생존하고 있는 ‘세대’가 곧 ‘말세’요 ‘재림을 준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사실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고, 즉 종말은 바로 내일 아니 오늘이라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일깨워 주시면서, 그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준비 자세를 이어지는 또 다른 비유를 통해 연이어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기서 “집 주인”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는 명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만약 주인이 한밤중에 예고 없이 돌아왔을 때 문지기가 쿨쿨 자고 있다가 주인이 깨워야 비로소 깜짝 놀라 일어나서 문을 연다면, 차라리 문지기를 세워 둘 필요도 없이 그냥 주인이 돌아와서 문을 두드려서 종들 중에서 아무나 깨우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이처럼 문지기는 주인이 언제 오더라도 바로 그 시각에 반드시 깨어 있는 것이 절대적인 사명인데, 이것은 곧 신자가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하시더라도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 다시 말해서 ‘신앙을 지키고’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예수님 재림하시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아이구, 나도 예수 믿습니다.’라고 신앙고백하는 것은 마치 문지기가 주인이 도착한 후에야 깨는 것과 똑같이 아무 소용없는 일일 뿐인 것입니다.

  반면에 “그 종들”에게는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겼다”고 했습니다.
  즉 그 주인은 자기가 떠나 있는 동안에 종들이 놀지 않도록 일거리를 맡겼으며, 그 각각의 책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필요한 권한도 주었던 것입니다.
  물론 주인이 돌아오면 그렇게 맡긴 일을 각 종들이 어떻게 수행했는지를 꼼꼼하게 살펴 볼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그때까지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반드시 완수해야 함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으니까 아무 염려할 것 없네.’ 하고 빈둥빈둥 노는 것을 우리 주인께서는 결코 허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문지기’와 ‘종’의 비유로 우리에게 재림 준비를 명하셨을 때, 그 둘 중에 하나만 하면 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겠습니까?
  결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무 행함도 없이 그저 믿음만 있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고, 그렇다고 믿음도 없이 그저 선행만 많이 쌓는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닌 것은 너무나도 자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정말로 ‘깨어 있는’ 성도는, 그 ‘깨어 있는 믿음’에 ‘충성과 봉사’가 따르는 자, 다시 말해서 ‘신행일치’를 지키고 있는 자이며, 오직 그런 성도라야만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영광의 상급과 칭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일반화된 요즘에는 회사에 출근을 하고 책상 앞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근무 시간 중에도 친구들과 이메일 쪽지로 잡담을 주고받는다든지 인터넷 게임을 하는 사원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리더스다이제스트에 보니까, 이제 자기 회사 사원들의 컴퓨터 사용 내역을 감시하는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회사들이 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세일즈를 나가는 영업사원들 역시 회사차의 주행거리가 올라가 있는 것만 가지고서는 과연 열심히 고객들이나 거래처를 만나고 있는지 아니면 어디 슬쩍 놀러 다니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휴대폰으로 위치추적을 하여 사원들의 근무상태를 철저히 파악하는 것 역시 흔히 시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이야말로 저와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을 위에서 다 내려다보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깨어 있으라’고 명하시고 또한 ‘사무’를 맡기신 후에 승천하셨는데, 당신께서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 당신의 종들이 정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는지, 아니면 적당히 요리조리 빠져나가면서 꾀를 피우고 있는지 그 얼마나 정확하게 살피고 계시겠습니까?
  주일마다 교회에 ‘출석’해서 예배당에 앉아 있고 신앙생활의 ‘주행거리’는 몇 십 년이 된다 해도 다 진심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깨어서 기다리는 ‘신앙인’은 아니며, 목사의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나름대로 새벽기도에도 부지런히 나온다고 해서 다 정말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 충성하는 ‘사명인’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을 예비하는 사람들은 몇 명 정도로 제한되어 있었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모든 성도들이 다 예비해야만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 구체적인 방법을 이처럼 아주 명백하게 요약정리까지 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주님의 재림 준비를 제대로 못한 사람은 그야말로 변명의 여지가 없지 않겠습니까?
  ‘무화과나무의 잎사귀’가 여름이 가까움을 알려 주는 것처럼 온갖 ‘말세의 징조’들이 바로 오늘날의 ‘세대’에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사무를 맡기시면서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신 대로 늘 ‘참된 신앙’과 ‘충성된 행실’로써 완전히 준비된 가운데 주님께서 언제 재림하시더라도 그 날 ‘영화’의 자리에 꼭 설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무화과(無花果)나무’라는 이름 자체에는 사실 모순이 있습니다.
  ‘꽃이 없는 과목(果木)’이라고 해서 그렇게 부르지만, 무화과나무에서 ‘열매’처럼 보이고 우리가 ‘과실’처럼 먹고 있는 것이 실상은 ‘꽃’이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를 먹어 보신 분은 알겠지만, 그것을 쪼개어 보면 안에 ‘꽃술’이 뭉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그 ‘꽃술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진짜 꽃술’이며, ‘열매의 껍질’처럼 보이는 부분이 바로 ‘꽃받침’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꽃’이라 해도 현실적으로는 그것을 ‘열매’로 취급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다른 과목들과 마찬가지로 무화과나무 역시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만 그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며, 그렇지 못할 때에는 ‘찍혀서 불에 던짐’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열매가 없는’ ‘과목(果木)’은 오직 ‘화목(火木)’이 될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교회와 성도가 반드시 맺어야 할 ‘열매’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결코 ‘인간사회에 정의를 구현시키고 세상을 유토피아로 변혁시키는 일’이 그 존재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치가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병약한 사람을 치료해 주는 선행’을 위해 있는 단체가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사업가들이 해야 할 본업이고 복지센터에서 주관해야 할 의무입니다.
  교회는 그 무엇보다도 전도와 선교에 주력하여 ‘구령의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교회가 되어야만 예수님께서 지금도 진행하고 계시는 구속사에 요긴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신자 역시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것은 심지어 ‘동물’조차 본능적으로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의미가 ‘착하게 살고 선하게 행동하는 데’에 있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도 결코 안 됩니다.
  그것은 다른 ‘우상종교인’들이 똑같이 따르고 있는 ‘인본주의 종교의 제1계명’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 신자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오직 ‘신행일치의 열매’를 반드시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예수님께서 ‘천국 곳간’에 들이시는 ‘알곡’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주간에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의 요점은 너무나 명백하지 않습니까?
  교회는 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여 ‘십사만사천 인 중에 남은 자’를 부지런히 모으는 ‘구령의 열매’를 계속 생산해야 하며, 각 신자는 이 구세주께서 이제 심판주로서 ‘반드시 속히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가운데 ‘신행일치의 열매’를 간직하면서 그 날을 예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 ‘고난주간’과 금요일에 있을 ‘정사기념예배’를 통하여 이처럼 ‘그리스도의 구속사 완성을 위하여 쓰임 받는 교회’, 이처럼 ‘깨어서 자기에게 맡겨진 사무를 완수하는 신자’로서의 서원을 다시금 되새기고 굳게 결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