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4-02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마가복음 6장 1-6, 14-29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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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04-02
2017′경향의 강단(15) (2017년 4월 2일 / 주일 대예배)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마가복음 6장 1-6, 14-29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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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마가복음 6장 1-6, 14-29절/ 석기현 담임목사

  요즘 ‘세월호’ 인양 작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미수습 희생자 시신을 찾아내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일 수는 있겠지만, 저는 어느 신문에 ‘세월호 침몰에 대한 확실한 원인이 이제 드러났으면’이라는 제호가 붙은 기사를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아니, 세월호가 침몰한 원인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까?
  그 동안 정부의 관계기관에서 그렇게 철저히 조사를 하고 발표를 했는데도 그것은 절대 믿지 못하겠다는 뜻입니까?
  하기는 인터넷 댓글에 보면 아직도 ‘미군 잠수함과의 충돌 때문’이라는 음모설이 여전히 돌고 있고, 게다가 ‘세월호’의 하부 선체에 아무 충돌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자 ‘미군 잠수함이 충돌 후에 즉시 수리를 해 놓고 도망갔다.’는 ‘음모설 수정안’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런 사람들은 ‘대통령이 배가 침몰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지시를 내렸다.’는 따위의 무슨 ‘새로운 증거’가 ‘세월호’의 선체 내에서 발견되기를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그만하면 원인 규명이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생각되는 사실에 대해서 아직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의식 구조가 도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처럼 이상할 정도로 ‘믿지 못하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는 충분한 증거와 완벽한 조건까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불신자’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주어진 말씀을 통해 우리가 온전한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 꼭 벗어나야 할 것들과 꼭 집중해야 할 사실들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온전한 신앙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의 인성’에만 머물지 말고 ‘그 신성에서 나오는 지혜와 능력’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1절부터 6절의 말씀에 “1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5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30세가 되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직전까지 사셨던 곳은 ‘갈릴리 나사렛 동네’였습니다.
  잠시 태어난 곳보다는 어린 시절에 쭉 자라났던 곳이 아무래도 진짜 고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래서 예수님에게도 고향 하면 곧 나사렛 동네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나사렛은 갈릴리에서도 작은 동네에 들어갔으며, 그래서 나중에 유대의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그런 이름도 없는 촌구석에서 어떻게 메시아같이 위대한 인물이 나올 수 있겠느냐는 핀잔을 듣게 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사렛은 어쨌든 예수님에게는 분명히 고향이었는데, 오히려 그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사건이 오늘 본문에 나오고 있습니다.
  1절에서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라고 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곳곳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파하시다가 공생애 사역이 시작된 이후로는 처음 나사렛으로 돌아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갈릴리 동네에서도 그렇게 하셨듯이 거기서도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당시에는 그 동네의 회당장이 허락하면 유대인 성인 중 누구나 회당의 강단에 설 수 있었으며, 이미 예수님의 명성은 나사렛에까지 잘 알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을 봉독한 후에 설교해 주시는 말씀을 들은 나사렛 사람들의 첫 반응은 본문에서 “많은 사람이 듣고 놀랐다”고 했듯이 경탄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 모두는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라고, 그야말로 입을 쩍 벌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그처럼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보유하고 계시는 지혜’가 당시 유대 사회의 최고 학부를 졸업한 사람조차 가질 수 없는 것이었으며 ‘그 손으로 행하시는 권능’ 또한 인간의 상식과 논리를 완전히 초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이 그들 앞에 분명히 나타난 사건이었습니다.
  즉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그 깊고 오묘한 말씀과 베풀어 주시는 그 기적적인 신유, 이 두 가지가 다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님을, 예수님이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보여 줄 길이 없는 ‘신적 지혜’요 ‘신적 능력’인 것을 자기네의 귀와 눈을 통해 똑똑히 체험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최종 평가와 판단은 어처구니없게도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배척’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배반하다, 성내다, 공격하다.’ 등의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상대방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신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곧 3절에 나오는 대로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요셉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한 것을 볼 때, 예수님의 육신적 부친인 요셉은 일찍 죽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을 가리켜 “목수가 아니냐”라고 했으니, 예수님께서는 30세 즈음에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는 아버지 요셉이 했던 목수 일을 이어받아서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하는 가장 노릇을 하셨을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같은 동네에 살면서 그와 같은 예수님의 성장기를 쭉 보아왔던 까닭에 그 예수님의 인간적, 사회적 배경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무슨 왕족이나 뼈대 있는 집안의 가족이 아니라 목수의 아들이라는 천민 출신이며 지금도 그들과 매일 만나고 있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과 그 누이들”의 평범한 형이요 오빠일 뿐이라는 사실에 대한 선입견이 그 나사렛 사람들의 뇌리에 아주 깊이 박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은 방금 전에 자신들이 목도했던 예수님의 초인적인 지혜와 능력을 깡그리 무시하면서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는 일생일대의 오판을 내리게 됩니다.
  ‘예수라는 이 사람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너무나 잘 아는 우리 마을 사람이고 결국 우리와 별 다를 바 없는 사람이다.’라는 고정관념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신성’으로부터 나오는 그 놀라운 지혜와 그 엄청난 권능을 완전히 잊어 먹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영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스스로 날려 버리면서 끝내 ‘불신자’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의 당신에 대한 그런 거부반응을 두고 예수님께서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고 하신 것은, 선지자가 타지에서는 항상 큰 존경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타지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고향에서는 더욱 존경을 받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더 이상 큰 “권능”을 행하지 않으시고 그저 “소수의 병자”만 고쳐 주신 후에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시면서” 다른 “촌”으로 가셔서 “두루 다니시며” 다시 복음 전파를 계속하셨습니다.
  당신의 ‘신적 지혜와 권능’을 보고서도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더 이상 시간과 힘을 낭비하실 생각이 전혀 없으셨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많은 사람들이 그 나사렛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신성’을 보지 못하고 오직 ‘인성’만 보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는 믿지 않고 그냥 ‘훌륭한 사람’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예수님을 ‘백년에 하나 날까 말까 한 위인’이라고 부르든지 혹은 ‘4대 성인 중의 한 명’이라고 자기 나름대로는 높인다 할지라도 사실은 여지없이 ‘불신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눈을 크게 뜨고 찬찬히 살펴보면 우리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의 깊고도 오묘한 것은 세상의 그 어떤 현자의 교훈도 감히 비교의 대상조차 되지 못할 정도로 비범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비단 그 육신의 병만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아예 그 심령을 완전히 새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신 능력 또한 세상의 그 어떤 위인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실로 놀라운 이적과 기사의 연속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죄인 대속을 선언하신 일은 역사상 소위 성자라고 손꼽히는 석가모니나 마호메트나 공자의 일생에서 그 비슷한 것조차 발견할 수 없는, 그야말로 경천동지, 전무후무한 사건입니다.
  이 모든 것은 아무리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이라도 결코 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런 ‘신적 면모’는 전혀 볼 줄 모르고 그저 ‘예수라는 인물도 결국 우리와 같은 사람에 불과하지.’라는 선입견 때문에 그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기를 거부하면서 예수님을 배척하고 맙니다.
  실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판단이요 치명적인 선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인을 구원해 주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까지 친히 내려와 주신 예수님을, 그렇게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다고 해서 오직 사람으로만 취급하고 성자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일생일대의 오판이며 그야말로 ‘용서 받지 못할 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근대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소위 ‘역사적 예수’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금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예수님은 긴 세월과 후대 사람들의 ‘신학적 재해석’으로 인해 많이 ‘변색’되었으니, 2천 년 전에 팔레스타인 지방에 사셨던 ‘실제적 예수님’의 모습을 역사적으로 다시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주장의 이면에는 ‘예수님의 신성’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인성’만 ‘역사적 진실’이라는 의미가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곧 ‘나사렛 사람’들이 저질렀던 잘못을 고스란히 답습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신으로 추앙’하는 바람에 인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은 후대의 신학자들이 ‘신격화’시켜 놓아서 ‘성자 하나님’이 되신 분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이미 ‘하나님의 독생자’이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까지 친히 찾아와 주신 구세주이십니다.
  즉 예수님의 ‘인성’만 보게 되면 자연히 그 ‘신성’을 부인하게 되지만, 예수님의 ‘신성’을 먼저 깨닫게 되면 그런 예수님이 ‘인성’을 가지신 존재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 되어 주셨다는 사실이 그 얼마나 놀랍고도 고마운 일인지를 제대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기록된 성경을 통해 우리 눈앞에 똑똑히 증거되고 있는 예수님의 놀랍고도 위대한 ‘신적 지혜와 권능’을 통해 ‘진실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확실히 믿고 영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온전한 신앙에 이르기 위해서는 또한 ‘육체의 소욕’에 사로잡히지 말고 ‘자신의 심령을 감동시켜 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14절 이하 29절에 기록하기를 “14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15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16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17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18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19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20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21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22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소녀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23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24그가 나가서 그 어머니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머니가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25그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니 26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27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28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가 이것을 그 어머니에게 주니라 29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헤롯’이라는 이름의 왕이 여러 명 등장하는데, 본문에 나오는 “헤롯 왕”은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안디바’로서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에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의 분봉왕 즉 로마제국이 임명한 일종의 ‘허수아비 군주’였습니다.
  그는 파다하게 퍼져나가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고 하면서 두려워했습니다.
  대중은 예수님을 가리켜 “엘리야” “옛 선지자 중의 하나” 등으로 설왕설래하고 있을 때 헤롯 왕은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고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헤롯이 자기가 세례 요한을 죽인 것에 대하여 그 이후로도 계속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것은 “전에” 일어났던 사건이었는데, 헤롯 왕이 자신의 이복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을 했을 때였습니다.
  헤로디아는 자기의 아주버니와 정략적인 결혼을 하기 위해 남편 빌립과 이혼을 했는데, 율법에 의하면 이런 행위는 간음과 근친상간의 죄를 동시에 범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이 일을 두고 헤롯 왕을 크게 책망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세례 요한은 체포되어 옥에 갇히게 되는데, 그것은 헤롯 왕이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헤로디아의 등쌀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내린 지시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17절에 “이 여자(헤로디아)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배경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19절에 보면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라고 한 대로, 그녀는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둔 것만으로는 도저히 성에 안 차서 아주 끝장을 내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헤롯이 그것만큼은 끝까지 반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헤롯의 그런 좀 의아스러운 행동에 대하여 20절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고 설명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헤롯은 세례 요한의 책망이 옳은 말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으며, 그런 까닭에 아무리 헤로디아가 들들 볶아도 차마 그를 죽이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헤롯의 의지는 “헤롯이 자기 생일에... 잔치할” 때 꺾이게 됩니다.
  그 잔치의 특별순서로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해 준 것이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 ‘헤로디아의 딸’이란 헤로디아가 그녀의 전 남편인 빌립 사이에서 낳았던 딸 ‘살로메’를 가리킵니다.
  본문에 “소녀”라고 번역된 단어는 ‘결혼적령기에 이른 처녀’를 지칭하는 말로서 여러 정황을 미루어 볼 때 살로메는 이 당시 15세에서 20세 사이의 ‘하이틴’, 그야말로 여자로서 꽃처럼 피어오르는 나이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뜻 상상하기에는 이 장면이 그저 초등학생 쯤 되는 어린 의붓딸이 자기 양아버지 앞에서 귀엽게 춤을 춘 것처럼 여겨지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시 왕의 연회에서는 매우 음란한 춤이 여흥으로 공연되는 것이 상례였는데, 여기서 살로메가 춘 춤도 그런 종류의 춤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나사렛 예수’ 영화에 보면 이 장면에서 이제 막 여인으로 성숙하기 시작한 살로메가 실로 ‘요염한 자태’로 춤을 추는 것을 보면서 헤롯이 홀딱 빠져 버리는 모습이 아주 실감나게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헤롯 왕은 살로메에게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고 그야말로 입이 헤 벌어진 상태로 맹세까지 덧붙이면서 약속을 합니다.
  그러자 살로메는 자기 어머니 헤로디아가 시키는 대로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했고, 그제야 헤롯은 사태를 파악하고 또다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심히 근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좌중의 많은 손님들 앞에서 자신의 “맹세한 것”에 대한 체면 때문에 헤롯 왕은 어쩔 수 없이 세례 요한을 처형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똑같은 사람 헤롯을 두고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20절에서 그는 세례 요한이 자신의 죄를 책망하는 말조차 달갑게 여길 만큼 양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22절에서는 살로메의 음란한 춤 앞에서 오로지 자신의 정욕에 꼼짝 못하고 사로잡힌 사람이 되었습니다.
  헤롯이 조금만 더 정신을 차렸더라면 세례 요한의 책망에 대한 자기 양심의 반응에 따라 바른 판단을 내리고 옳은 행동을 보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그 가장 저급한 말초신경의 자극, 그야말로 ‘육체의 법’에 압도당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양심과 인격을 굴복시켜 순종하지 못하면, 그 다음에 남는 것이란 이처럼 가장 동물적인 욕망과 저질적인 본능에 끌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 전에는 설교를 듣고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회개하던 사람이, 돌아서고 나면 금세 ‘육체의 법’에 그 심령이 지배를 당하면서 아주 쉽게 죄를 짓고 맙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리에서는 그 심령이 ‘천당 소망’으로 가득 차서 기쁨이 넘쳤다가도 월요일에 직장으로, 사업처로 출근하는 첫 순간부터 당장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만 온 정신이 팔리게 됩니다.
  주일에 SFC 성경공부 시간에는 한없이 ‘순결하고 건전하던 마음’이, 학교에 가서 불신 친구들을 만나기만 하면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그 ‘음녀의 잔’을 함께 마시게 됩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할’ 신자가 오히려 ‘악에게 그 가진 선마저 완전히 빼앗기는’ 일이 너무나 쉽게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처럼 ‘말씀에 감동 받는 심령’을 끝까지 따르느냐 아니면 ‘저급하고 본능적인 육체’에 끌려가느냐 하는 차이는 결국 엄청난 양극단의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전자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찾게 되지만, 후자는 마귀와 함께 지옥 영벌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양심에 찔림’까지 느꼈으면서도 결국 어처구니없게 ‘육체의 정욕’에 압도당해 버리는 것은 실로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대로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았지만 곧 넘어지고 결실하지 못하는 자’가 되고 마는 꼴이 아니겠습니까?

  진정한 신자가 되려면 그처럼 ‘이성’이 ‘정욕’ 앞에 맥을 못 추고 넘어져서는 안 됩니다.
  ‘신앙 양심’이 ‘말초신경적인 욕구’에 패배를 당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법’은 항상 ‘성령의 법’을 거스르면서 유혹해 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자신의 육체를 쳐서 복종케’ 함으로써 ‘자신의 심령이 성령의 법 안에 거하도록’ 만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회개와 구원의 기회가 한때 그처럼 자기 마음속 깊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것을 놓치고 만 헤롯을 교훈으로 삼아, 육신의 유혹이나 정욕에 포로가 되지 않도록 늘 자신의 심령의 귀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더욱 집중시키는 가운데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아 그대로 믿고 확신에 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시스템이나 프로그램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면서 온갖 오류가 발생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심령도 마귀가 심어 놓은 ‘영적 바이러스’에 오염되면 바른 신앙에 도달하지 못하고 끝내 불신앙의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서도 대한민국 정부의 발표는 절대로 믿지 못하겠다는 자들처럼,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향 사람이면서도 끝내 예수님을 믿지 못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기본 상식만 있어도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일인데도 그저 조작설과 선동에만 휩쓸려가는 자들처럼, 자신의 ‘양심의 소리’보다는 충동적인 정욕에 사로잡히고 만 헤롯이 그처럼 ‘불신앙의 바이러스’에 오염되고 만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자들이야말로 나중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때 훨씬 더 크게 원통해 할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애당초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야 뭐 후회할 것도, 원통해 할 일도 없겠지만, 그처럼 ‘신앙인’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그것을 제 발로 차 버렸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땅을 치면서 후회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보면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말씀이 여러 차례 나오는데, 그 대상이 바로 ‘나사렛 사람’이나 ‘헤롯’ 같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들은 그냥 초지일관 불신자로 산 사람들이 아니라, ‘왕의 잔치’에 초대를 받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주의 가르침’을 직접 듣기도 했으며 심지어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종으로서의 봉사’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온전한 신앙에 이르지 못하고 중도탈락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마지막 심판 때 다른 불신자들과 같이 지옥의 어두운 구덩이 속으로 떨어질 때 너무나 원통해서 이를 바득바득 갈 수밖에 없게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믿을 수 있는 기회, 정확하게 믿을 수 있는 증거, 잘 믿을 수 있는 조건들이 충분하게 주어져 있지 않습니까?
  완성된 신구약 66권은 하나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죄인의 구세주’이심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으며, 보혜사 성령께서는 지금도 우리의 심령 속에 내재하시면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복하며 회개하도록’ 그 양심을 감화 감동시켜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한다면 정말 ‘이상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은혜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도 만에 하나 불신앙에 빠지고 만다면 저와 여러분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더 ‘슬피 울며 이를 갈’ 사람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그저 ‘훌륭한 사람’으로만 격하시키려는 온갖 이단의 미혹에 빠지지 말고 오직 그 놀랍고 위대한 ‘신적 지혜와 권능’을 똑똑히 목도하고, 사람의 심령을 ‘육체의 법’에 사로잡히도록 끌어당기는 온갖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지 말고 오직 ‘심령을 감동시키는 말씀’만을 청종함으로써 참된 신앙, 구원에 이르는 온전한 신앙을 끝까지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