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3-26 “큰 무리와 열두 제자”마가복음 3장 7-19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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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경향의 강단(14) (2017년 3월 26일 / 주일 대예배)
“큰 무리와 열두 제자” 마가복음 3장 7-19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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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무리와 열두 제자"

마가복음 3장 7-19절/ 석기현 담임목사
지난 몇 달 동안 온 나라를 혼란에 몰아넣었던 대통령 탄핵안이 드디어 헌재의 최종적 인용과 함께 일단 종결됨으로써 이제 정국은 5월 초순으로 계획된 대선을 향해 달리게 되었습니다.
  이번 대선에도 여러 후보들이 나서고 있는데, 그처럼 대통령이 되겠다는 뜻을 품은 대선주자들 곁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모이게 됩니다.
  우선 그 후보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지지해 주는 ‘대중’이 있는데, 이들은 다수이기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한순간에 그 표심이 바뀔 가망성도 적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또 한 부류는 바로 그 후보를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측근’으로서, 이들은 수적으로는 얼마 안 되지만 자기가 모시는 지도자에 대하여 그야말로 온 마음과 힘을 다 바쳐서 충성하는 자들입니다.
  물론 측근들 중에 나중에 돌아서거나 배신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지만, 일단 기본적으로는 ‘다수의 유권자’보다 후보자 본인에게 있어서 훨씬 더 중요한 ‘소수의 핵심멤버’인 것입니다.

  이제 막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에게도 그와 똑같은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따라다니던 ‘큰 무리’가 있었는데, 이들은 오늘날의 정치인에게 있어서 바로 ‘지지층’ 혹은 ‘추종자’들에 해당됩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특별히 뽑아서 당신 가까이에 두셨던 ‘열두 제자’는 곧 ‘측근’ 혹은 ‘가신’에 해당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핏 보면 이 양자가 다 ‘예수님 편’에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지만, 실제적으로는 이 둘 역시 아주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무리’와 ‘제자’는 이들 쪽에서 예수님을 대하는 마음과 자세에서도 달랐지만, 예수님께서 이들을 대하시는 방법 역시 크게 달랐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 있어서 그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가깝고도 소중한 사람들이었는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교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사실입니다.

  이 시간 저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과연 예수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무리’와 ‘제자’를 각각 어떻게 달리 대하고 계시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무리’가 어떤 개인적 요구를 가지고 나아오든지 간에 먼저 ‘복음의 말씀’부터 나누어 주십니다.

  7절부터 12절에 “7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8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9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10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11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2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2장과 3장 서두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의 공생애 사역이 시작된 직후부터 벌써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여러 차례 ‘충돌’하시게 됩니다.
  그 결과 바로 앞 6절에서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이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게 될 정도로 이미 예수님을 극도로 혐오하는 적대세력이 형성되었습니다.
  바로 그 직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신”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바다”란 곧 ‘갈릴리 해변’을 가리키는 말인데, 사람들이 많은 동네나 바리새인과 조우하기 쉬운 회당을 일부러 피해서 그처럼 한적한 곳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두려워해서 후퇴하거나 피신하신 것은 결코 아니며, 오직 아직은 대적들에게 당신을 넘겨주실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 즉 팔레스타인의 원근각지로부터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 왔습니다.
  이들은 당시 로마제국과 헤롯왕과 사두개인 등의 지배계층에 의해 고통을 당하던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신 큰 일” 즉 예수님께서 온갖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기대감을 잔뜩 품고 예수님께 모여든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데는 아주 현실적인 목적 또한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10절에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어디 누군가에게 무슨 특별한 신유의 은사가 있다 하면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기 마련이지만, 당시처럼 아직 의학이 그리 발달되지 못한 사회에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나 유대뿐 아니라 이두메나 두로와 시돈 같은 먼 이방 지역으로부터도 꾸역꾸역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여든 엄청난 대중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9절을 보면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먼저 만나겠다고 서로 밀치며 몸싸움하는 군중들로부터 피하시기 위해 아예 “작은 배”를 타시고 해변으로부터 조금 떨어지셨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큰 무리가 왜 당신께 그처럼 열성적으로 찾아오는지 이유를 잘 알고 계셨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지는 않으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주된 사역이었다면, 그렇게 배를 타면서까지 그들과의 접촉을 피하려 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 대신에 찾아오는 순서대로 번호표를 나누어 주어 한 사람씩 질서 있게 당신을 만나서 안수기도를 받게 해 주시거나, 아니면 어디 집을 정하고 방에 들어가셔서 그처럼 무리들이 에워싸 밀지 못할 공간을 확보하신 후에 문 하나만 열고 한 명씩 들어오게 하셨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배를 타시고 그들과 약간의 거리만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거리는 그리 멀지 않더라도 그처럼 물을 가운데 두게 되었으니 우선 그들을 직접 안수하시면서 병 고치는 기적을 베풀어 주실 수는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이것은 다른 사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그 배를 강단으로 삼아서 그들에게 설교를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저 병 고침을 받겠다고 그처럼 엄청나게 몰려온 무리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기대나 요구와는 전혀 다르게 오직 ‘천국 복음’을 우선적으로 선포해 주셨던 것입니다.

  11절 이하의 내용은 그처럼 우선 말씀을 가르치신 후에 신유의 기적도 베풀어 주셨음을 보여 주는데, 그 과정에서 “더러운 귀신”들은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순간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외치면서 그동안 괴롭히고 있던 병자의 몸에서 즉시 빠져나갔습니다.
  마귀가 부리는 귀신들이 그처럼 예수님 앞에서 당장 항복 선언을 하면서 패퇴한 것은 예수님이 진정 메시아로 오신 분이심을 재차 확증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무리’가 메시아에게서 기대하고 있던 바는 오직 정치적 해방과 경제적 충족뿐임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십자가 대속을 통해 메시아로서의 진짜 사역을 완수하실 때까지는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공생애 초기부터 당신께서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주된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주 명백하게 밝히셨습니다.
  그것은 대중이 원하고 기대하는 ‘육신의 건강’이나 ‘재물의 축복’이나 ‘사회정의 구현’이나 ‘국가 해방과 독립’ 따위가 아니라, 오직 모든 사람에게 ‘죄 사함과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절대다수의 대중이 당신에게서 얻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너무나 잘 알고 계셨지만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오직 그들의 육신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살려 줄 생명의 말씀 즉 ‘천국 복음’을 가르쳐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너희들의 개인적 필요와 욕구가 무엇이든지 간에 내가 너희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은 바로 영생 구원을 얻게 해 주는 복음뿐이다.’ - 이것이 우리 예수님께서 지금도 당신 앞에 찾아오는 ‘무리’를 대하시는 요지부동의 원칙인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교인들이 자기가 원하는 것들, ‘병 고침’이나 ‘자녀의 대학입학’이나 ‘남편의 승진’이나 ‘사업의 대박’을 위해 예수님께서 뭔가 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교회에 모여 북적대고 있습니다.
  그런 교인들은 예수님을 그저 ‘자신의 목적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실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신성모독의 죄를 이미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처럼 ‘소원을 이루어 주는 램프의 요정’ 같은 ‘메시아’를 기대하면서 당신 앞에 모여 드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오늘날도 ‘자기를 그런 메시아로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지 않겠습니까?

  그 어떤 요구를 가지고 당신께 나아오는 사람이든지 간에 우리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복음부터 제일 먼저 선포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처럼 교회에 나오면서 ‘육신적이고 현실적인 뭔가를 얻으려 하는 자’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먼저 ‘복음의 말씀’부터 받아먹어야 할, 그야말로 ‘아직 젖도 떼지 못한 유아 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른 교회는, 진짜 목사는 바로 그 ‘말씀 선포’만을 항상 최우선의 사명으로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저 병 고침을 받겠다고 모여든 ‘큰 무리’에게 작은 배를 강단으로 사용하시면서까지 오직 ‘말씀’부터 가르쳐 주셨던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교회생활을 하면서 어떤 ‘개인적인 요구’를 앞세우지 말고 무엇보다도 먼저 ‘복음’부터 분명히 영접하여 구원의 확신에 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세우신 ‘제자’들이 어떤 인간적 면모를 가지고 있든지 간에 오직 ‘전도의 사명’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13절 이하 19절에 기록하기를 “13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16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 19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고 했습니다.

  아까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을 피해 “바다로 물러가셨던” 예수님께서 이제는 “산에” 오르셨습니다.
  ‘산’은 예수님께서 당신께로부터 병 고침을 받겠다고 몰려드는 ‘무리’를 피해 조용히 기도하시기 위한 장소이기도 했고, 또한 당신의 ‘제자’들하고만 특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여기서는 그렇게 산에 오르신 후에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셔서” 제자로 삼으신 장면이 나옵니다.
  공생애 초기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일반 제자’들은 많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열둘”을 구별해서 세우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열두 명이 임명되는 과정에는 신청자 접수나 합격자 발표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대학교 입학이나 박사 과정 등에서 절로 따르게 되는 무슨 서류 심사라든지 테스트는 고사하고 면접조차 없었습니다.
  그냥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택하시고 부르셔서 세우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기준’을 세우시거나 ‘자격’ 따위를 비교해 보신 것도 전혀 없습니다.
  그야말로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제자로 세우셨는데, 이것은 16절 이하에 나오는 그 “열둘”의 면모를 살펴보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시몬”에게는 “베드로”라는 별명을 지어 주셨는데, 이것은 ‘반석’이라는 뜻과 관련되는 말로서 나중에 일어난 저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 사건에서도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이름입니다.
  실제로 베드로 본인의 자질이나 성격 등을 따져 본다면 사실 ‘반석’이라는 별명은 그리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는 반석처럼 든든하고 믿음직해서 어떤 큰 일의 기초가 될 만한 인재가 전혀 아니라, 쉽게 흥분하고 경박스러운 데가 있었으며 또 예수님을 배반하기까지 할 정도로 실상 아주 나약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시몬에게 그런 별명을 붙여 주신 것은, 그처럼 약점투성이의 ‘인간 시몬’이 변화되어 장차 복음전파의 사역에 ‘반석 같은 사도’가 될 것을 미리 내다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에게는 “보아너게” “우레의 아들” 혹은 ‘천둥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셨습니다.
  나중에 이 형제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하늘에서 내리는 불로써 즉결처단’하자면서 흥분한 적도 있었고(눅 9:54),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자기 형제들을 그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구하기도(마 10:37) 했습니다.
  그처럼 다혈질이면서 명예욕도 있었던 야고보와 요한의 성격을 두고서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신 것을 보면, 우리 예수님께서 유머도 얼마나 풍부하신 분이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여튼 ‘베드로’라는 별명은 앞으로 시몬이 변화되어 갈 것을 예언해 주신 것이라고 한다면, 이 ‘보아너게’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평생 바꿀 수 없었던 인간적 본성을 묘사하신 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처럼 각자의 ‘개성’이 뚜렷했을 뿐 아니라 그 ‘출신 배경’이나 ‘사회적 지위’도 다양했습니다.
  우선 “야고보” “요한”의 아버지였던 “세베대”는 고기잡이를 하면서 “품꾼들”을 고용할 정도로(막 1:20) 부유한 어부였습니다.
  “마태”는 잘 알려진 대로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대표적인 ‘매국노’나 마찬가지였던 ‘세리’였었지만, 반면에 “가나안인 시몬”은 ‘열심당원’ 즉 요즘으로 치자면 ‘운동권 출신’ 내지는 ‘독립투사’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룟 유다”도 있었는데 이 “가룟”이란 예루살렘 서쪽에 있는 마을의 이름입니다.
  즉 ‘갈릴리’ 촌동네 출신이었던 대부분의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이 유다만 유일하게 ‘수도권’에 살던 사람이었고, 그러니 아마 세상 물정에도 가장 밝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순전히 당신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열두 제자’로 세우셨지만, 그렇게 하신 목적은 딱 하나였습니다.
  바로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라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함께 있게 하시고”란 그 ‘열둘’을 ‘당신과 동고동락하는 내제자’로 삼으셨음을 뜻합니다.
  “전도도 하며”란 지금 예수님께서 직접 갈릴리를 중심으로 전파하고 계시는 천국 복음을 앞으로는 이들을 통해 온 세상 땅 끝까지 전하게 하실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 사명 수행을 위해서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해 주셨는데, 이것은 단지 ‘귀신병 걸린 사람을 고쳐 주는 신유의 은사’뿐 아니라 ‘마귀의 전반적인 활동에 대항하여 이길 수 있는 영력’을 보유하게 해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로 세우신 자들은 그저 인간적으로만 보면 다들 성격에 모난 데도 있고 약점투성이였으며 아예 수준 미달되는 것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불완전하고 허점 많은 사람들을 그냥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택하셔서 제자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일단 제자로 세워 놓으신 후에 그들의 좋지 못한 성격을 고쳐 주시거나 그 다양한 출신배경에 따른 버릇이나 약점들을 바로잡아 주시느라고 3년 동안 애를 쓰셨습니까?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로 하여금 무슨 도를 닦게 하거나 인성교육 따위를 시키신 분이 결코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그런 인간적인 약점은 그냥 ‘너희 둘은 평생토록 우레의 아들처럼 살거라.’라고 하신 것처럼 유머로 넘기시고, 오직 그들을 장차 복음 전파를 위해 쓰일 전도자로 만드시는 일에만 주력하셨습니다.
  즉 ‘시몬’을 ‘베드로’로 바꾸는 교육, ‘제자’를 ‘사도’로 키우는 특수훈련을 열두 제자들 모두에게 똑같이 시키셨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도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를 부르시고 교육시키시는 불변의 원칙이 아니겠습니까?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지만, 신자가 된 후에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고쳐지지 않는 육신의 약점과 문제점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핍박자 사울’이 하루아침에 변하여 ‘사도 바울’은 될 수 있어도, ‘그리 믿음직해 보이지 않는 인상’이나 ‘어눌한 말주변’ 같은 인간적 면모는 평생토록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부 시몬’이 ‘수제자 베드로’까지 될 수는 있지만, ‘불같이 급한 성미’나 ‘겉보기와는 달리 겁 많은 본성’은 좀처럼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의 부끄러운 면모와 연약한 됨됨이를 잘 아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사용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뭔가 도통한, 뭔가 거룩한, 뭔가 우러러보이는 ‘도인’이나 ‘성인’을 만드시려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당신의 복음 전파에 합당하고 유용하게 쓰일 ‘전도자’로 교육시키고 파송하실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을 자신의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무리’에서 벗어나서 예수님을 자기 전 인생의 ‘목적’으로 섬기는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순전히 자신의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면 예수님께 ‘한 표’ 찍어 줄 수도 있다는 ‘지지자’가 아니라, 그처럼 예수님께 ‘쓸모가 있는’ 존재, 아니 예수님께 ‘아주 요긴한’ 측근이 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도 ‘우레의 아들’ 같은 성격이나 버릇은 여전히 고치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오직 ‘베드로’와 같은 ‘제자로서의 새 이름’을 받아서 전도와 선교의 고귀한 사명을 위해 크게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3장 마지막 부분인 31절부터 35절에 “31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복음 전파 사역에 쓰임 받게 된 ‘제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성취하는 일에 쓰임 받는 제자’들은 심지어 당신의 혈육인 마리아나 야고보보다 훨씬 더 가까운 진짜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까지 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면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이’, 그야말로 ‘하나님의 최측근이요 가족’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정말 굉장한 말씀이 아닙니까?
  천주교에서 ‘성모’라고 떠받들고 있는 마리아가 아니라 모든 기독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혈육’이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나중에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까지 되었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보다 훨씬 더 ‘하나님과 족보가 가까운 친족’이 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로 ‘무리’에서 벗어나 ‘제자’가 될 때 그런 엄청난 ‘신분의 격상’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지상교회에서 다수를 이루는 것은 여전히 ‘무리’이며 ‘제자’는 소수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현대 교인들이 평생 교회에 다녀도 ‘예수님께 필요하고 소중한 제자’가 되지 못하고 그저 ‘젖 달라고 보채는 유아’의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삼국지’에 보면, 당양현 장판에서 유비는 조조의 군대로부터 습격을 당하게 되는데, 그 와중에 유비의 아내 미부인과 그녀가 낳은 어린 아들 아두가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적진 속에 고립되고 맙니다.
  그때 조자룡 장군이 혈혈단신으로 적군 한가운데를 그야말로 좌충우돌하면서 돌파하여 드디어 그 두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다리를 다친 미부인은 자기도 함께 말에 올라타면 짐이 될 것을 염려하여 아두만 조자룡에게 맡긴 후에 스스로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을 합니다.
  조자룡은 어린 아두를 자기 갑옷 품속에 넣고 다시 조조의 군대를 헤치고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유비에게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유비는 “이 아이 때문에 하마터면 훌륭한 장군을 잃을 뻔했다.”고 분개하면서 조자룡이 자기 품에 건네주는 아들 아두를 땅바닥에 내팽개칩니다.
  실로 주군에게 있어서는 자기에게 충성을 다하는 부하가 자신의 친아들보다도 훨씬 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도 마찬가지로 당신의 ‘육신적 혈육’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제자’가 훨씬 더 가깝고 사랑스럽고 귀중하기 짝이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마다 예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으려고만 하는’ 교인들이 옛날 갈릴리 바닷가에 모여든 ‘대중’처럼 북적거리고 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자신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거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금세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외치면서 돌아서고 말 것이 분명합니다.
  반면에 예수님께로부터 ‘복음 전파 사명을 위해 부름을 받고 파송을 받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에 비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습니다.
  하지만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측근’과 ‘가신’들은 온갖 고난 중에도 자기가 모시는 지도자 곁에 변함없이 서 있다가 결국 영광도 함께 나누게 되듯이, 예수님의 뒤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참된 제자 또한 ‘주님께서 천군천사를 대동하고 재림하시는’ 그 날에 영광의 면류관과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려고 가는 사람은 결코 예수님께 ‘진정으로 가까이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예수님 바로 곁에 바짝 다가가 있는 사람은 오히려 예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시려는 말씀을 사람들에게 대신 전해 주고 예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대신 맡기실 수 있을 만한 사람이야말로 진짜 ‘예수님과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무언가를 얻을까 하여 예수님 주변에 모여 있는 무리’가 아니라 ‘예수님을 곁에서 모시고 섬기는 제자’가 되어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 앞에 나아올 때마다 그 무엇보다도 먼저 ‘복음의 말씀’부터 달게 받아먹고, 그 후에는 ‘가든지 보내든지’ ‘전도의 사명’을 위해 쓰임을 받음으로써, ‘무리’의 단계에서 벗어나 ‘제자’의 수준에 꼭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