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3-19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마가복음 1장 1-13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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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03-19
2017′경향의 강단(13) (2017년 3월 19일 / 주일 대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마가복음 1장 1-13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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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마가복음 1장 1-13절 / 석기현 담임목사
어떤 유명인사를 공식적 자리에 초청하게 되면 으레 소개가 있기 마련입니다.
  통상 사회자가 “이번에 모신 분은 아무 아무개이십니다.
 ”라고 소개를 하게 되는데, 단지 이름 석 자만 말하지 않고 그 사람에 대하여 가장 잘 알려진 정보나 사회적 직위 등을 함께 알려 줍니다.
  그렇게 소개를 받고 등단한 유명인사 역시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자신에 대한 소개를 덧붙이게 되는데, 특히 처음 만나게 되는 사람은 그런 ‘본인 소개’를 통해서 그 유명인사의 개인적인 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과 더불어 ‘공관복음’이라고 불리지만, 그 셋 중에서 예수님의 말씀이나 생애에 대한 기록이 다른 두 복음서에 비해서 짧은, ‘가장 간결한 복음서’입니다.
  이것은 같은 사건을 기록하면서도 그 세부사항을 ‘요약’한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아예 ‘생략’한 것도 있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해서 마가복음이 다른 복음서들보다 ‘내용이 알차지 못하다’거나 ‘무언가 부족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처럼 ‘간결하게 압축된 내용’을 통해 그 강조하고자 하는 요점이 더욱 뚜렷하고 강력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 바로 마가복음 고유의 장점인 것입니다.

  이러한 마가복음의 특징은 그 첫 절에서부터 고스란히 나타는데, 바로 본문 1절의 “1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기록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생’이나 ‘유년 시절’에 대한 기사는 한마디 언급조차 없이, 곧바로 이 구세주의 ‘공생애’를 보여 주는 제1막이 열리면서 ‘지금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복음이 시작됩니다!’라는 딱 한 줄로써 그 주인공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소개가 이처럼 간단하면서도 명료한 까닭에 오히려 우리 마음에 실로 똑똑하고도 강렬하게 와 닿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로 오신 분이시다.”
- 마가는, 아니 마가를 감동시키신 성령께서는 마가복음을 통해서 바로 이 사실 한 가지를 분명하게 선포해 주려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과 부활의 계절이 점점 더 무르익어가는 오늘 주일에 저는 본문의 말씀이 우리 예수님을 어떻게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해 주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오실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이미 예언된 사실입니다.

  2절부터 8절에 기록하기를 “2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8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공식적 소개를 첫 한 절로 끝낸 마가는 자기가 방금 소개한 사실에 대한 근거를 바로 이어지는 2절부터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사역입니다.
  엄격히 따지자면 2절 하반절은 말라기 3장 1절에서 따온 것이지만 같은 사실에 대한 ‘예표’이기 때문에, 마가는 문맥을 자연스럽게 연결해 주기 위해서 이것을 “선지자 이사야의 글”과 나란히 인용했습니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시기 전에 먼저 ‘그 길을 준비할 사자’를 보내시겠다는 예언이었는데, 그 사자가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는 이사야 40장 3절이 세례 요한의 사역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을 볼 때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4절 이하에 나오듯이 그는 실제로 유대 “광야”에 거주하면서 사역하였고 또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는데, 그것은 곧 등장하시게 될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역으로서 너무나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공생애의 핵심은 곧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해 주는’ 십자가 대속사역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을 진정 자신의 구세주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준비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뿐 아니라 아예 스스로의 입으로도 자신은 자기 뒤에 오실 구세주를 위해 길을 준비하는 사역자일 뿐임을 명백히 밝혔습니다.
  그는 우선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고백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자기 집에 손님이 찾아왔을 때 그 샌들을 벗겨 주고 발을 씻겨 드리는 것이 관습이요 예의였지만, 아무리 귀한 손님이 오더라도 그런 ‘천한 일’을 주인이 직접 나서서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종에게 시켰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례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분을 두고 자기가 친히 그의 ‘신발끈을 풀어 드리는’ 것조차 도저히 ‘감당치 못할’ 정도로 과분하고 황공무지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처럼 예수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으로 받들었을 뿐 아니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고까지 증거했습니다.
  즉 자기가 수행하고 있는 사역 또한 오로지 자기 뒤에 오실 분께서 친히 행하실 사역의 ‘준비 과정’에 불과하다고 명백히 선을 그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 요한은 자기가 지금 사람들에게 베풀고 있는 ‘죄 사함을 얻게 하는 물 세례’보다 훨씬 더 중요한 진짜 세례는 곧 사람을 본질적으로 중생시키고 구원을 얻게 해 주는 ‘성령 세례’이며 이것은 오직 장차 오실 메시아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천명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세례 요한은 비록 신약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 세례 요한의 사역과 증거야말로 ‘구약 전체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동시에 그 ‘구약 예언의 초점’이 예수님께로 직결된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증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 주시기 전에 먼저 ‘내 사자’ 즉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실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예언했는데, 그 예언이 세례 요한을 통해 이처럼 한 치 오차도 없이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그 세례 요한은 순전히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일’ 하나에만 전념한 참 특이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온갖 인생사에 대한 조언자’나 ‘역사의 일반적 미래에 대한 예언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마치 ‘임금님 납시오!’라고 왕의 행차를 선포하는 내관처럼,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성자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화육강세해 주셨음을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알리는 ‘외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는 광야에 등장할 때부터 옥에서 순교할 때까지 오직 ‘자기 뒤에 오시는, 자기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곧 ‘사람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을 얻게 해 주실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이 한 가지 사역에만 자신의 전 생애를 풀타임으로 다 바쳤던 것입니다.

  이것은 보다 더 근본적으로 따져서 말하자면, 세례 요한은 스스로의 판단에 의하여 예수님을 증거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구약에서 예언된 그대로’ 예수님이 곧 그리스도로 오신 분임을 증거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그런 세례 요한의 사역을 기록하면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된 것과 같이”라고 논증했던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구약 성경’이 ‘오실 메시아, 곧 당신에 대한 예언’임을 천명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이외에 이처럼 그 탄생과 사역이 미리 예언된 인물이 역사상 단 한 명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분야에 훌륭한 인물이 한 명 등장하면 ‘100년에 하나 날까 말까 하는 인물’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런 사람이 태어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음을 반영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위인이나 현인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에게 애당초 그의 어머니가 무슨 신기한 ‘태몽’을 꾸고 그를 임신하게 되었다느니 혹은 무슨 삼신이 ‘점지’해 주었다느니 하는 따위의 이야기가 따라오기도 하지만 다들 그저 ‘설화’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태어난 직후나 그 전성기에조차 ‘이 분은 세상에 4대 성인 중의 한 분으로 오신 분이시다.’라고 누가 곁에서 소개해 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고 한참 지난 후에야 그런 이름으로 추앙을 받았을 뿐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백년에 한 명’ 정도가 아니라 아예 ‘창세 이래 종말까지 다시는 없을 유일무이한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뿐 아니라, 놀랍게도 그 사실이 이미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말라기까지 수많은 선지자들에 의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연히 태어난 위인’이 아니라,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하실 분이신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실 분인지, 심지어 어떻게 죽으시고 언제 다시 살아나실 것인지에 대해서까지 속속들이 예언되었고 하나도 빠짐없이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자기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자’에게 ‘성령으로 중생을 베풀어 주실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라고 모든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증거하는 이 예수님을 진정 ‘나의 그리스도’로 뜨겁게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성부 하나님께서 친히 확증해 주신 사실입니다.

  9절 이하 13절의 말씀에 “9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2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 사건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의 소개에 즉시 뒤를 이어 이제 드디어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현장에 ‘등단’하시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마가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과 세례 요한 사이의 대화’는 생략하고 그저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라고 그 모든 세부사항들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 정리했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는 ‘예수님께서 친히 세례를 받으신 이유’도 설명해 주고 싶었지만, 마가는 이 사건을 통해 오직 10절과 11절에 기록된 일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직후 물에서 나오시는 순간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라는 사실과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즉 ‘성령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께서 이 예수님의 공생애 취임식과 같은 현장에 친히 왕림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이 사건은 ‘삼위 하나님’께서 동시에 나타나신, 성경에서 몇 안 되는 특별한 경우 중의 하나가 되었는데, 이것은 예수님 역시 ‘성자 하나님’이심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명백히 확증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안에 보이는 “비둘기같이” 예수님에게 내려오셨을 뿐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귀에 들리는 육성으로써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선포해 주기까지 하셨으니, 그야말로 더 이상 다른 무슨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는 완벽한 소개가 아니었겠습니까?

  곧바로 이어지는 12절과 13절에서도 이런 문맥의 흐름이 그대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신” 이 유명한 사건에 대해서도 마가는 마태나 누가와는 달리 그 시험의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그 대신에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고, 언뜻 사건의 핵심에서 벗어나는 내용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마가만의 의도적인 강조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비록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령이” 주도적으로 행하신 일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신 까닭에 결코 ‘사탄’에게 휘둘리는 수동적, 종속적인 존재가 되실 수가 없었으며, 또한 사탄은 예수님의 공생애 첫 순간부터 훼방을 시도했던 ‘하나님의 원수’인 것이 명백히 밝혀진 것입니다.
  그처럼 사탄의 시험을 받으시며 현실적으로는 “들짐승과 함께” 기거하셨으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천사들” “수종”을 받으셨다는 것 역시 예수님은 지극히 높은 ‘성자 하나님’이심을 재차 강조해 준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그랬고 지금도 타종교에서나 이단에서 그렇게 떠받들고 있는 ‘천사’란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그저 당신께서 마음대로 부리시는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까지 마가는 덧붙여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단의 장면은 모든 ‘영적 존재’들이 다 등장하면서 그 각각이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종합적이면서도 실로 간단명료하게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동시에 등장하시면서 예수님 역시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성자’이심이 천명되고 있습니다.
  ‘타락한 천사’인 ‘사탄’과 ‘예수님의 수종자’인 ‘천사’ 또한 함께 등장하면서 앞으로 이어질 예수님의 공생애에 있어서 이 둘이 어떤 위치에 있으며 무슨 역할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처음부터 확실하게 그 ‘캐릭터 설정’을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런 소개는 바로 앞에 나왔던 ‘선지자들의 증거’보다 더욱 근본적이지 않습니까?
  마치 사회자의 ‘공식적 소개’보다 본인의 ‘자기소개’가 더욱 청중의 가슴에 와 닿고 뇌리에 깊이 인식되듯이, 이 ‘하나님의 자증’이야말로 다른 그 어떤 객관적인 설명이나 증거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도 뜨겁게 우리의 심령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은 당연히 하나님 당신만이 가장 잘 알려 주실 수 있는 대상이시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하나님은 ‘여호와’ 곧 ‘스스로 계신 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숭배 대상’이 되기 전부터 이미 자존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슨 신화나 전설 따위 때문에 사람이 알게 된 ‘객체’가 아니라, 영원 전부터 벌써 살아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소위 ‘시공의 출발점’이라고 하는 ‘특이점’ 따위의 ‘원인’으로 인해 비로소 존재하시게 된 ‘결과’가 아니라, 아예 인과법칙과 존재 그 자체를 완전히 초월하시는 ‘절대 주권자’이신 것입니다.

  그러니 비록 ‘완전한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시기는 했지만 원래부터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님 또한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렇게 소개를 했기 때문에 드디어 역사에 등장하신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물론 ‘사람이 만들어 낸 돌과 나무의 우상 신’들과 나란히 비교될 수 있는 대상도 절대로 아니십니다.
  더욱이 몇 십 일의 단식을 하면서 온갖 잡귀와 난투 끝에 간신히 이김으로써 ‘큰 깨달음’을 얻어 불타가 되었다는 싯다르타나, 대중 앞에서 ‘산아, 이리로 오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산이 꿈쩍도 하지 않는 몰창피를 당한 후에 ‘산이 내 쪽으로 오지 않으면 내가 산이 있는 쪽으로 가는 것이 도리이다.’라는 천재적인(?) 자기변명과 임기응변의 능력을 보여 주었던 마호메트 같은 자와 나란히 둔다는 것은 말도 안 될 일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공생애 내내 마귀와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치르다가 마지막 순간 골고다에 가서야 비로소 승리하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뱀의 머리를 밟으실 독생자’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랫동안의 명상과 수도를 통해 간신히 ‘득도’하고 ‘환골탈퇴’함으로써 드디어 ‘성인’의 경지에 오른 것이 아니라, 태초 때부터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장차 역사와 인류의 종말에 심판주로 재림하실 ‘알파와 오메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요 8:14)고, 당신의 본성에 대해 실로 당당하게 ‘자증’하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한복음 곳곳에 나오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양의 목자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그 길이요 그 진리이다.’라는 저 유명한 ‘에고 에이미’(나는 ...이다.)의 자기선언은, 오직 이처럼 참된 ‘성자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제아무리 뛰어난 위인이고 현자고 성인이라고 해도 결코 자기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에 대하여 자증하실 수 있으며, 하나님만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장 정확하고도 권위 있게 선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생애가 시작되는 첫 순간, 첫 장면에서부터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요 8:18)고 당신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이처럼 생생하게 확증해 주시는 예수님이 곧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독생자’이심을 굳게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 마가복음의 첫 구절은 바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실로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베드로가 그렇게 믿고 고백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베드로가 이것을 깨닫기 훨씬 전부터 이미 이 사실을 선포했고, 베드로는 오직 그대로 믿고 고백했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도중에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아주 엄히 명령하신 이유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차게 되면 절로 드러나고 알려질 일이지, 사람이 그렇게 여론몰이를 하고 추종자들을 형성하면서 정치적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되는 일이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정치인들이라면 은근히 바라고 뒤에서 조종까지 할 일, 곧 대중이 당신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 하는 현장을 일부러 피하여 떠나신 것도 그런 일이 당신에게는 전혀 필요가 없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옹립을 받으셔서 메시아가 되신 것이 아니라 애당초 ‘왕 중의 왕’으로 탄생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제가 대학교에서 무슨 교양과목 강의의 첫 시간에 들어갔을 때였습니다.
  담당 교수님께서 들어오셔서 과목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시는데 정작 본인에 대해서는 아무 소개도 하지 않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실은 그 분이 민주화 투쟁 때문에 교직에서 물러나 계시다가 막 복직하신 너무나 유명한 철학자 및 사상가이셨기 때문에 웬만한 학생들은 다 알고 있는 분이시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교양과목인지라 여러 단과대학에서 모여든 이백 명 쯤 되는 수강생들 중에는 당연히 그 교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학생도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중 제일 앞줄에 앉아 있던 한 명이 “그런데 교수님은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교수님은 그 학생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 “자네는 무슨 학과인가?”라고 되물으셨습니다.
  그 학생이 “상경대학 경영학과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그 교수님은 “흠, 경영학과라...” 하면서 혼잣말처럼 되뇌신 후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그냥 강의를 진행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그 학생은 무안할 수밖에 없었는데, 제가 곁에서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였습니다.
  그 교수님께서 ‘흠, 경영학과라...’는 말씀 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신 것은 마치 ‘이 대학교에서 제일 우수한 학과의 학생이라고 맨날 공부만 하다 보니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모양이구먼...’이라는 무언의 핀잔처럼 제게도 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건 이후로 그 교수님에 대한 존경심이 한 ‘반’ 정도 줄어들었는데, 아무리 본인이 유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강의의 첫 시간에 최소한 자기 이름 석 자는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처럼 ‘너희들이 내가 누구인지 알아서 모셔라.’는 식의 고자세로 우리 앞에 나타나신 분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제일 첫 순간에 당신이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소개해 주신 분이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을 두고 심사숙고하거나 고민을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실로 ‘중요한 질문’이기는 하지만 결코 ‘어려운 질문’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을 두고 조금이라도 궁금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스스로 깨달아서 대답해야 할 질문’이 아니라 이미 ‘성경이 그 정답을 가르쳐 주고 있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신학자들이 평생 풀어야 할 난제’가 절대로 아니라 ‘선지자들이 정확하게 예언했고 하나님께서 명백하게 자증해 주신 사실이요 진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그 마지막 사람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해 주실 메시아이시다.’라고 이구동성으로 예언해 주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도 동시에 한 자리에서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시다.’라고 자증해 주셨습니다.
  실로 완벽하고도 멋지기 이를 데 없는 ‘예수님 소개’가 아닙니까?
  ‘예수를 더욱 깊이 생각하는’ 이 계절에 저와 여러분 역시 이처럼 성경이 일러 주고 선포해 주는 그대로 ‘예수님은 나의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굳게 믿고 진실하게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