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3-12 “죽음의 고난에서 영광과 존귀로” 히브리서 2장 5-10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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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03-12
2017′경향의 강단(12) (2017년 3월 12일 / 주일 대예배)
“죽음의 고난에서 영광과 존귀로” 히브리서 2장 5-10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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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고난에서 영광과 존귀로"

히브리서 2장 5-10절 / 석기현 담임목사
마크 트웨인이 쓴 ‘왕자와 거지’라는 소설은 한 소년 왕자가 왕궁의 문지기에게 혼이 나고 있는 자기 또래의 거지를 구출해 주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왕자는 그 거지를 자기 방에까지 데리고 들어와서 대화를 나누다가 바깥사회에 직접 나가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그래서 결국 거지와 옷을 서로 바꾸어 입고 왕궁 밖으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다시 왕궁으로 들어가려 하니까 문지기가 그를 넣어 줄 리가 없었습니다.
  완전히 거지 몰골을 하고 있는 자신이 사실은 왕자라는 것을 증명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인데, 그로 인해 처음에 그저 재미로 시작했던 거지 생활을 진짜로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온갖 우여곡절과 고초 끝에 그 왕자는 자신의 원래 신분을 되찾기는 했지만, 만약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더라면 그런 해피엔딩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높은 신분에 있던 사람이 낮은 신분으로 한 번 떨어지면 대부분 그것으로 끝장이기 때문입니다.
  군인이 불명예제대를 당하거나 공무원이 한직으로 좌천되면 다시 회복되기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대통령도 일단 물러나면 모든 권력과 명예가 다 사라질 뿐 아니라 면책 특권까지 없어지면서 일반인과 똑같이 기소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어찌하든지 그 자리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며, 때로는 불법적으로 자신의 권좌에 평생 앉아 있는 독재자도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점에 있어서 전혀 색다른 사람이 역사상 딱 한 분 계시는데,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하여 온갖 애를 쓰신 것이 아니라 성자 하나님이시면서도 오히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까지 내려오심으로써 높아지신, 실로 역사상 전무후무한 분이셨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주어진 본문의 증거를 통하여 우리 예수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스스로를 지극히 낮추심으로써 지극히 높아지신 분이신지를 두 가지로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비하’를 통하여 ‘권세’를 얻으신 만유주이십니다.

  5절부터 8절 상반절에 기록하기를 “5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6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7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8a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의 유대인들 사이에는 ‘천사숭배’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앞의 1장에서 예수님은 천사보다 훨씬 더 우월하신 분이심을 논증했습니다.
  본문에서도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그 이유 중에 하나로 하나님께서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장차 올 세상”이란 바로 내세, 곧 예수님께서 재림하심으로써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그 영생의 세계는 오직 구속주로 오셨으며 장차는 심판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전적으로 ‘복종’하게 되어 있는 것이며, 천사들은 그때도 예나 마찬가지로 오직 예수님의 통치를 수종드는 사역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그런 천사를 예수님과 비교하는 자체부터가 어불성설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천사보다 훨씬 더 높으신 예수님께서 일견 천사보다 더 낮아 보이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곧 ‘성자의 비하’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이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것임을 6절 이하에서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라고 인용하면서 논증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인용문은 시편 8편 4절부터 6절의 내용을 따온 것인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 서신의 수신자들이 ‘디아스포라’ 즉 구약 성경을 잘 알고 있는 ‘흩어진 유대인 신자’들이었기 때문에 굳이 인용 출처를 자세히 밝힐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여튼 여기서 인용된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라는 첫 구절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듯이 이 시편은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아주 특별한 피조물로 창조해 주셨음을 찬송한 것이었습니다.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라는 구절에서 ‘잠시 동안’이란 단어는 ‘조금’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타락한 죄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을 때에는 일견 ‘천사보다 못한’ 존재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타락하기 이전의 원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어 주신 ‘아주 특별한 피조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하나님의 양자’가 된 신자는 바로 그 원래의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운 영화로운 신분을 회복하게 되며, 에덴동산에서 다른 모든 피조물을 정복하고 다스렸던 그대로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는” 권한 또한 발휘하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은 본질적으로 따질 때에 당연히 천사보다 높은 존재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시편의 말씀이 비단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완전히 성취된 것임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야말로 ‘완전한 사람’으로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하되신 모습 역시 일견 ‘천사보다 못한 존재’가 되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무슨 ‘신적 영광’ 같은 것을 찾을 수 없는, 그저 일반 사람과 별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이 땅에 사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처럼 자신을 피조물의 모습으로 낮추시는 ‘극단적인 비하’를 통하여 오히려 ‘지극히 높임’을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화육강세는 그 비하된 자리에 영원히 머물기 위함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처럼 스스로 ‘낮아지심’으로써 오히려 최고의 ‘신적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게 되셨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죽음에서 부활 승천하심으로써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사망에 사로잡힌 인간’이 아니라 ‘사망 권세까지 이기시는 하나님’이 되심을 만천하에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처럼 예수님께서 비하를 통하여 얻게 되신 영광이 곧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는”, 그리고 나중에 8절 하반절에도 재차 강조하듯이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마치 ‘피조물’과 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까지 내려 오셨지만 그것을 통하여 오히려 ‘만물을 복종케 하시는 절대주권자’로서의 영광을 얻으셨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성립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왜냐하면 ‘성자의 비하’야말로 그 성자께서 진정 ‘만유의 주’가 되심을 확실히 증거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가 아니고서는 스스로 피조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동물과 똑같이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은 ‘소’를 둔갑시켜서 ‘말’로 바꿀 수 없습니다.
  꼭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다른 동물이나 다른 무생물체로 바꾸고 싶어도 바꿀 능력이 전무합니다.
  즉 자신을 다른 존재로 바꾸는 것은 오직 태초에 이 모든 존재 세계와 그 가운데의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의 전능으로써만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고린도전서 15장 27절과 28절에 “27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보이는 사람’의 모습으로 자신을 비하시키심으로써, 진정 당신이야말로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시키시는 만유의 주’이심을 명명백백히 확증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역설적 표현입니다.
  원래 인간은 ‘자기를 낮춤’으로써 높아질 수가 없습니다.
  높아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자기를 낮추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다들 어찌하든지 올라갈 길만 찾고 작은 구멍 하나라도 보이면 기를 쓰고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비하를 통하여 오직 당신이야말로 천하만물과 모든 인간에 대한 주권자가 되시며, 금세뿐 아니라 장차 올 내세에 대한 전권까지 다 소유하고 계시는 ‘만유의 주’가 되심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세상의 다른 그 어떤 위인이나 호걸도 이런 식으로 자신을 높이지는 못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훌륭한 과학자나 최고의 기술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비하’시킴으로써 자기가 만물에 대하여 우위에 있음을 증거해 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오직 참 하나님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이 ‘성자의 화육강세’라는 기적적인 ‘낮아지심’을 통하여, 실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만물과 전 인류’에 대한 권세를 가지신 ‘왕 중의 왕’이심을 확실히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구원주이십니다.

  8절 하반절 이하 10절에 “8b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9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만유의 주’이시기는 하지만 아직은 그 완성의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 나오는 대로 이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이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히브리서 기자는 “오직 우리가... 예수를 보니”라고 놀라운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즉 천사보다 못한 것으로 간주되는 인간의 모습을 입으신 예수님의 ‘비하’된 모습을 통하여 우리 기독신자들이 지금부터 이미 볼 수 있는 확실한 사실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비하되심으로써 ‘신적 영광’을 스스로 버리신 정도가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고난’까지 받으셨습니다.
  화육강세하신 예수님께서는 ‘만물이 저에게 복종하는 권세’를 보여 주시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당신을 괴롭히는 세력에 대하여 어쩔 수 없이 당하기만 하는 지극히 무력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죽음의 고난’까지 받으셨으니 예수님은 그야말로 더 이상 내려가려 해도 내려갈 데가 없는 맨 밑바닥에까지 내려가셨던 것이었습니다.
  불신자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하지만 신자의 눈에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사실이 보이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그런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시게”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는 ‘비하’를 통하여 ‘만유를 다스리는 권세자’이심을 확증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고난’을 통하여 ‘구원의 주’로서의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게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10절 하반절의 말씀은 바로 이 사실을 두고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라고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란 물론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인데, 본문에 ‘창시자’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어는 ‘아르케고스’라는 헬라어 단어로서 ‘선구자’(pioneer) 즉 ‘어떤 일을 제일 처음에 시작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온전하게 하심”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목적을 이룸’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죄인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목적을 완성시켜 놓으신 창시자가 되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이 “합당하다” 즉 ‘당연한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당연한 일일 수가 있습니까?
  그토록 존귀하시고 죄 없으신 성자께서 최악의 죄인들이나 받아 마땅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신 일이 도대체 어떻게 ‘지당한’ 일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 질문은 10절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신 원인자’ 곧 성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그처럼 비하되시고 큰 고난을 받으신 것이 사람 생각에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로만 여겨지지만,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합당하게’ 즉 ‘당연하게’ 여기셨다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바로 9절 하반절이 가르쳐 주는 사실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스스로 고난을 당하시고 죽음까지 친히 ‘맛보심’으로써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누리게 하시려고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런 경천동지할 일을 지극히 ‘합당한 일’로 여기셨던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란 10절에 계속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 곧 ‘택자’들로 하여금 ‘천당의 영생’을 얻게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원래 이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었고 죄인에 불과했던 사람과는 지극히 거리가 먼 것이었으며, 반면에 ‘고난’이야말로 죄인들이 받아 마땅한 죗값이었고 완전무흠하신 예수님과는 아무 상관없어야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죄인들을 당신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아들들” 즉 ‘하나님의 양자’들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원래는 고난만 받아야 할 죄인들에게 영광을 주려고 하시니까 그 고난을 대신 받아야 할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로 그 죄인들을 구원하는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대신 받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논리가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죄인은 고난 받아 마땅한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지만, 하나님의 자비는 그 죄인으로 하여금 당신의 아들이 되고 양자의 영광까지 누리게 해 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이것은 서로 조화될 수 없는, 서로 균형을 이룰 길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주에게, 원래는 영광만을 받으셔야 할 구세주에게 그 죄인들이 받아 마땅한 고난을 대신 다 받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공의도 충족시키고 당신의 자비로운 구원 역시 완성하시는, 실로 오묘하고도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내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오묘한 하나님의 역사를 깨달은 자만이 예수님을 ‘구원의 주’라고 지극히 높이게 됩니다.
  빌립보서 2장 6절 이하 11절에 기록된 유명한 말씀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증거하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만 해도 이미 경천동지할 일인데, 그 예수님께서 사람이 받는 모든 슬픔과 질고를 친히 겪으실 뿐 아니라 그 끔찍한 십자가 고난까지 대신 당하셨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될 수 없는 일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사회에서도 연로하신 어머니께서 손수 설거지를 하려 하시면 자식들이 제발 하지 마시라고 말릴 것이고, 제가 심방을 가면서 여전도사님들을 위해 차문을 열어드려도 그분들이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런데도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의 비하와 고난을 두고서도 ‘내가 이렇게 너희들로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자비로운 일을 베풀어 주었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 ‘그렇게 하는 것이 내게는 당연한 일이었다.’라고 말씀해 주시니, 우리로서는 실로 몸 둘 바를 알 수 없는 황공무지한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이 사실을 깨닫는 자는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강력한 군주, 막강한 재벌이시라서 ‘주’라고 받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덕스러운 군자’, ‘지혜로운 현자’라고 해서 ‘주’로 모시며 따르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우리 예수님께서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메시아가 되신 까닭에 ‘예수님은 나의 진정한 구세주이십니다.’라고 감격적인 신앙고백을 하며 영원하고도 유일한 ‘나의 주님’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역사상 그 어떤 성인이나 교주라는 자들도 결코 보여 주지 못했던 이 신기한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 자신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써 모든 죄인에게 최고의 구원주가 되신 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진실로 예수님만이 나의 주님’이라고 뜨겁게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어찌하든지 ‘자신을 좀 더 영광스러운 위치로, 좀 더 차원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려 하는 것’이야말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으며 또한 다들 추구하는 인생 목표일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성공한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는 ‘위인’ 혹은 ‘성인’이라고 떠받들고 존경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인간 사회에서 ‘높은 사람’ ‘위대한 인물’로 인정받고 추앙받는 사람들은 다 ‘밑에서 위로 올라간’ 사람들입니다.
  즉 ‘빈손’으로 시작했다가 ‘권력’을 얻거나, ‘평범한 사람’에서 출발했다가 ‘훌륭한 인생’의 족적을 남긴 ‘위인’이나 ‘성인’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도 그들을 본받고 싶어 하며 높이 받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낮은 인간’에서 출발하여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신 분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이시면서도 자기를 스스로 ‘비하’시키셔서 ‘사람’이 되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해탈’을 통해 득도하신 것이 아니라, 저 하나님 보좌 우편의 고귀한 영광을 버리시고 죄인 대속을 위한 ‘고난’을 친히 당하심으로써 소위 위인이나 성인이라고 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아예 스스로를 차별화시키신 구세주이십니다.
  실로 예수님은 스스로 높아지려고 애를 쓰고 그 결과 높아진 세속적 위인들과는 정반대로, 스스로 ‘들레지도 아니하며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할’(마 12:19) 정도로 자신을 최하의 밑바닥에까지 낮추신 분이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어떻게 ‘천사’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예수님을 어떻게 ‘석가모니’나 ‘공자’나 ‘마호메트’와 나란히 놓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이 예수님 덕분에 진정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 곧 ‘택함을 입은 양자’로 회복된 성도들은 오직 그 ‘비하되신 성자’께만 모든 ‘영광과 권세’를 돌리고 그토록 ‘고난당하신 그리스도’만을 ‘유일하신 주님’으로 높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나중에는 ‘위대한 4대 성인’ 중에 하나가 되셨기 때문에 존경하고 따르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참된 신자는 예수님께서는 원래부터 ‘지극히 높으신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경외하고 받들어 모셔야 할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자수성가해서 성공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역할모델로 삼고 추앙하는 것도 절대로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그토록 지고하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나 같은 죄인을 구속해 주시기 위하여 ‘사람’으로 비하되셨고 십자가의 ‘고난’까지 당하셨다는 이 엄청난 사랑과 은혜 때문에 그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지극히 사랑하고 높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부터 우리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주제로 ‘부활절맞이 40일 특별새벽기도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심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낮추신 예수님, ‘사람과 같이’ 되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써 끝내 ‘만유의 주’로서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이 예수님은 정말이지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신기하기 짝이 없는 분이 아니십니까?
  실로 역사상 그 누구도 필적은 고사하고 비교의 대상조차 될 수 없는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신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지극히 낮추신 예수님, 죄와 조금도 상관없으신 지극히 거룩하신 성자이심에도 불구하고 오직 죄인에게 구원의 은혜를 거저 주시기 위하여 대신 십자가 고난까지 당하신 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고 뜨겁게 사랑하고 이 구원의 주님께 합당한 모든 영광과 존귀를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