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3-05 “흩어진 나그네, 택하심을 받은 자들” 베드로전서 1장 1-12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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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03-05
2017′경향의 강단(11) (2017년 3월 5일 / 주일 대예배)
“흩어진 나그네, 택하심을 받은 자들” 베드로전서 1장 1-12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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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나그네, 택하심을 받은 자들"

베드로전서 1장 1-12절 / 석기현 담임목사
사람은 ‘사회적 동물’인 까닭에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아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한 단체 안에서 혼자 따돌림을 당하는 소위 ‘왕따’가 되는 것도 괴로운 일이지만, 비록 어느 그룹에 속해 있더라도 주위의 다른 그룹에 비해 절대적 열세인 ‘소수’가 되는 것 또한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왕따’나 ‘소수’로 몰리게 되는 것을 아예 각오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기독신자인데, 이것은 이미 초대교회 시대 때부터 나타났던 일이었습니다.
  1절과 2절에 “1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기록된 것이 바로 그런 배경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로마 제국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본격적으로 심해질 무렵에 씌어졌으며, 아마도 이 서신을 받은 수신자 성도 중에는 이미 극심한 박해 아래 있는 자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지중해 연안 전체를 정복하고 지배하면서 오늘날의 역사가들에게서도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제국’이라고 인정받을 정도로 맹위와 명성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이제 막 시작된 기독교란 정말 미약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그래도 정치인들이 기독교의 영향력을 무시하지는 못할 만큼 되었지만, 당시의 기독교란 로마인들이 무시하던 유대교 안에서도 아주 작은 분파의 하나 정도로만 여겨졌을 뿐이었고, 게다가 기독교인들은 대다수가 종이나 노예 등 사회의 최하층계급 출신이었기 때문에 더욱 멸시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본문은 그처럼 로마제국 안에서 외면적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하찮아 보이던 기독교인을 “흩어진 나그네”라는 말로 잘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유대를 떠나서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 등 로마제국 산하 곳곳의 이방 지역에 살던 소위 ‘디아스포라’ 즉 ‘흩어진 유대인’ 출신의 기독신자들이었습니다.
  더욱이 그처럼 흩어진 유대인들도 대부분은 다 유대교를 믿었기 때문에 그런 디아스포라 유대인 중에서도 기독교인들은 더욱 극소수 집단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인이란 사회적으로 극히 취약하며 정치적으로 무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만 보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보기에 불과한 것이었고 그 내면의 실상은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어지는 2절에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기 위해 강조하고 있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초대교회 기독신자들은 비록 세상사람 눈에는 ‘흩어진 나그네’와 같이 약하고 엉성한 무리로 보였지만, 실상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 즉 하나님의 예정을 통하여 “택하심”을 받은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구원함을 얻었으며, 그 후로도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에 힘입어 성화 과정에 있는 아주 특별한 공동체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가졌던 확신이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공유했던 이 자부심을 다른 말로 하자면 곧 ‘우주적 교회관’입니다.
  우리 기독신자들은 그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 살고 있어도 바로 이 ‘우주적 교회’ 안에서 세상의 그 어떤 단체보다도 확실하고도 밀접하게 결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따돌림을 당하고 국가적으로 박해를 받던 ‘흩어진 나그네’에 불과했던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그처럼 강력한 신앙공동체를 세울 수 있었겠습니까?
  이 시간 저는 초대교회에서나 현대교회에서나 과연 어떤 신자들이 이런 ‘우주적 교회’ 안에서 하나로 똘똘 뭉칠 수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우주적 교회의 신자는 ‘중생 신앙으로써 천당 구원을 똑같이 소유’합니다.

  3절부터 5절에 기록하기를 “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그의 많으신 긍휼” 곧 성부의 ‘사랑’이 죄인을 살리기 위한 ‘구속사’가 시작된 원인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즉 오로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아끼시는 ‘독생자까지 주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탄생부터 시작하여 공생애 사역과 십자가 대속을 거쳐서 끝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신” 구속사의 정점에 해당되는 사건까지 이 땅에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창세 전부터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거듭나게 하시는” 중생의 은총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산 소망”까지 주어졌습니다.
  이 놀라운 새 생명의 구원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 즉 육신적, 세속적, 유한적인 것이 아니라 “하늘에 간직하신 것” 곧 천당에서 영생할 수 있도록 약속되어 있는 영원한 유업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엄청난 구원을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해” 놓으셨다고 했는데, 이것은 구속사의 완성이 세상의 종말과 함께 임하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라는 말을 좀 더 쉽게 번역하자면 ‘(너희의) 믿음을 보시고’라는 뜻으로서 구원은 ‘오직 믿음’만으로 얻을 수 있음을 다시금 강조해 줍니다.
  그리고 그처럼 믿음으로써 이미 ‘거듭남’을 받은 성도는 장차 하늘나라에 간직된 ‘영생의 유업’을 받게 되는 그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일단 중생을 받은 성도는 결코 도중에 취소되거나 탈락되지 않고 반드시 천당 구원에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는 ‘성도의 견인’을 뜻합니다.

  바로 이 구원에 대한 신앙, 즉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미 중생을 받았고 앞으로 천당 영생까지 꼭 누리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겉보기에는 이리저리 ‘흩어져서’ 전혀 결집이 안 된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같은 그리스도의 대속 보혈이 흐르고 있는 혈연 공동체였고, 인간사회에서는 정처 없는 ‘나그네’ 인생으로만 보였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선택을 통해 영구적인 본적을 하늘나라에 둔 ‘천년왕국 시민’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진주만 피습일’이 되면 ‘Pearl Harbor Survivors’(진주만 생존자)라는 글자가 박혀 있는 모자를 쓴 퇴역군인들이 행사장에 앉아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의 기습으로 인하여 수천 명의 미군들이 전사했던 그 비극적인 날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군인들입니다.
  죽음의 고비를 극적으로 통과하고 생존할 수 있었다는 특별한 체험이 그 사건이 벌어진 후 7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 노병들로 하여금 여전히 함께 모이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사망의 저주’를 벗어나서 ‘중생의 은총’을 입은 성도들의 동질감은 얼마나 친밀하겠습니까?
  영락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지옥 영벌’을 피하고 그 대신 ‘천당 영생’을 약속받은 성도들의 결속력은 얼마나 끈끈하겠습니까?

  교회는 바로 이 믿음을 똑같이 공유하고 있는 성도들이 모인 ‘신앙공동체’입니다.
  만약 교회가 무슨 취미나 이해관계나 정치적 목적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라면 그것은 세상의 여느 단체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이름만 ‘교회’일 뿐이지 그 실상은 ‘사교 클럽’이나 ‘계모임’이나 ‘정당’이나 마찬가지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참된 신앙인들이 모인 공동체에서는 개인적으로 어떤 지위, 어느 정도의 재력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가 각자 이 ‘밭에 감추인 보배’, ‘지극히 값진 진주’와 같은 구원의 확신을 소유하고 있는 이상 아무런 격차나 차별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깥 사회에서 사람을 여러 계층으로 나누던 기준들이 교회 안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이 세상에서는 빈부귀천의 차이가 좀 있다 해도 ‘똑같은 천당 소망’ 안에서 이심전심하고 있으니 그 어떤 갈등이나 시기가 일어날 이유가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육신적 현실과 사회적 배경은 저마다 다르다 할지라도 바로 이 ‘중생 신앙’과 ‘천당 구원’을 똑같이 간직함으로써 진정한 ‘우주적 교회’에 확실히 속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주적 교회의 신자는 ‘예수 사랑으로써 모든 연단을 함께 통과’합니다.

  6절부터 9절의 말씀에 “6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베드로전서는 기독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박해가 본격적으로 강화될 무렵에 기록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의 박해는 3백 년 동안 항상 일정하게 계속된 것이 아니라 드문드문 간격을 두고 그 강도가 높았던 시기가 있었는데, 이 베드로전서의 배경이 된 박해가 구체적으로 어느 때에 있었던 것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바울은 네로 황제 때에 순교 당했을 것이라는 전승이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하며, 그렇다면 이 베드로전서는 로마의 대화재 사건 직후에 기독교인들을 범인으로 몰아서 무참하게 살해했던 때에 기록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라는 말이 당시의 초대교회 성도들이 당하고 있던 그 두려운 현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 사도 베드로는 먼저 ‘천당 소망’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며, 이제 여기서는 그런 시험이야말로 오히려 성도를 더욱 아름답게 성화시켜 주는 ‘연단’이라고 격려했습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라는 말은,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연단을 받는데, 하물며 금보다도 훨씬 더 귀한 너희들은 당연히 이런 과정을 통과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연단을 통해 우리를 더욱 순수한 신앙인으로 성화시켜 가시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처럼 시험과 박해를 통하여 잘 연단 받은 신자들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즉 주님 재림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을 수 있는” 즉 보석 중의 보석같이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영화의 단계’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이 간단해서 연단이지, 그것을 직접 받고 견뎌낸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 몸을 불로 태우는 듯한 극심한 고통을 과연 어떻게 실제로 참아내고 끝까지 통과해 낼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베드로는 이어지는 8절에서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고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 사랑’이야말로 온갖 ‘시험의 연단’을 넉넉히 이기게 해 주는 최고의 동기요 원동력이라는 뜻입니다.

  그 누구보다 베드로 자신이 예수님께로부터 이 사실을 직접 배웠습니다.
  그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완벽한 믿음을 제일 처음으로 고백했던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모자랐던 까닭에 그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시험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믿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확인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 사랑’을 온전히 회복함으로써 베드로는 나중에 ‘늙어서 자신의 팔을 벌리고 남이 띠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는’ 즉 십자가에 달려 순교를 당하게 될 때에도 이전처럼 실족하지 않고 끝까지 그 연단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짜 사나이’라는 텔레비전 프로에 보면 거기에 출연했던 연예인들이 그 이후에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재회의 모임까지 가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군대에 가 볼 기회가 전혀 없었던 여자 연예인들은 생전 처음으로 받는 그 지독한 훈련을 끝내고 수료식을 하게 될 때에는 서로 얼싸안으며 다들 눈물을 펑펑 흘리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고통스러운 연단’을 함께 통과해 낸 사람들 사이에서만 나눌 수 있는 자부심과 결속력이란 실로 각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신자들 역시 바로 그처럼 자랑스럽고도 감격적인 순간을 같이 맞이할 사람들입니다.
  그때는 곧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이유 때문에 당하는 온갖 시험과 고난들을 당당히 통과한 후에 우리의 재림주 예수님께로부터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되는 때입니다.
  같은 군인이라도 실전에서 온갖 위험을 통과하면서 임무를 완수한 군인, 혹은 적군에게 붙잡혀서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군사기밀을 발설하지 않았던 군인에게 훨씬 더 영예로운 훈장이 주어지는 것처럼, ‘불로 연단되는’ 것 같은 시련마저 이겨낸 성도에게 당연히 최고의 상급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냥 형식적인 신앙고백만 한 교인이 아니라 오직 ‘예수를 진정 사랑하는’ 성도만이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함께 설 수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보지는 못했지만 성경 말씀과 성령의 감동을 통해 오히려 ‘예수님을 본 사람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킴으로써 금세에서 당하는 모든 시험과 환난을 능히 이겨내고 그 ‘영광스러운 즐거움’에 꼭 함께 참여하는 ‘우주적 교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우주적 교회의 신자는 ‘성경 중심으로써 동질의 신앙생활을 영위’합니다.

  10절 이하 12절에 “10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이라는 말씀은 성경 전체의 주제와 성경이 기록된 목적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증거해 줍니다.
  즉 성경의 주제는 신구약 공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은 바로 ‘죄인 구원’에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성경 덕분에 “너희에게 임할 은혜” 즉 구원의 복음이 저와 여러분에게까지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그 성경을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기록했다고 한 것은, 사도 베드로가 이 베드로전서를 쓸 때까지는 아직 신약 성경이 완성되지 않고 오직 구약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다”는 말은 그들이 성경을 ‘기계적으로 받아 쓴’ 것이 아니라 자기 시대 이전에 기록된 성경을 열심히 읽고 또한 기도하며 “상고”하는 가운데 영감을 받아 쓴 것임을 가리킵니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
이 그들에게 “증언해” 주었다는 말씀이 바로 구약의 선지자들 역시 신약의 사도들과 똑같이 오직 그런 ‘성령의 유기적인 감화감동’ 가운데 성경을 기록했음을 명백히 증거해 줍니다.

  그렇다면 그 선지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구약에 기록한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곧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한” 것,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아까 성경 전체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라고 했는데, 그 중에서 신약은 ‘이미 오신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며 구약은 바로 이 본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장차 오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라고 한 대로 구약 선지자들의 이와 같은 성경 기록 사역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모든 성도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똑같이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 전하는 자들”이 된 사도들 역시 ‘전도’와 ‘신약 성경 기록’을 통해 그 예수 구원의 복음을 “이제 너희에게 알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이 구약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고난과 영광에 대해 예언한 것들이 하나도 어김없이 그대로 성취되었고 신약의 사도들이 바로 그 사실을 신약 성경을 통해 확실한 증거로 남긴 것은 실로 우리가 “알게 된” 가장 완벽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성경 계시의 심오함과 완전무결함은 심지어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사도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로서 애당초 “감추어졌던 것”이었습니다(고전 2:7).
  그처럼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던” 계시를 오직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이었고(엡 3:5), 그런 까닭에 그때까지는 천사들조차 보고 싶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천사도 흠모하는 성경이 우리 신자들에게 주어져 있는데, 도대체 왜 천주교에서는 아직도 이 성경을 제쳐놓고 ‘천사의 계시’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것입니까?

  우리나라 사회와 정치에서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원칙이 아직도 통하고 있는 것은 곧 법치의식이 여전히 결여된 저질 국민성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입니다.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전 국민이 모두 다 ‘법 앞에 동등함’을 인정하고 ‘법의 판결에 순복’하면 서로 우격다짐은커녕 언성을 높일 필요조차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비록 기독교 안에 여러 교단들이 있고 한 교단 안에 많은 교회들이 있으며 한 교회 안에 또한 수많은 교인들이 있지만, 그들 모두가 다 ‘똑같은 법’만 존중하고 복종하면 아무 다툴 일이나 싸울 일이 없습니다.
  ‘우주적 교회’에서는 곧 ‘성경 말씀’이 그 절대적인 헌법입니다.
  즉 오직 성경만을 ‘신앙과 행위의 유일무이한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교회와 신자는 절로 ‘우주적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신앙생활을 사사 시대처럼 ‘각기 자기 소견대로’ 하려 하니까 결국 교단이 나누어지게 되고 온갖 이단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같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면 그 예수님을 믿는 신앙고백의 내용과 그 주님을 따르고 사는 방법도 똑같아야 마땅합니다.
  그 유일한 길은 오직 ‘성경 중심’의 원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법이 다르면 서로 외국인일 수밖에 없고 같은 법을 따르면 같은 나라의 국민이 되듯이, 오직 성경 말씀대로 믿고 사는 것만이 ‘동질의 신앙’을 공유하는 ‘우주적 교회’의 일원으로 만들어 준다는 사실을 꼭 깨닫고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미국에 있을 때 ‘The Practice’(변호사업)라는 제목의 드라마를 애청했었는데, 거기서 이런 장면이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변호사이면서 작은 로펌(법률회사)의 사장이었는데, 그의 직원 변호사 중 한 명이 총상을 당해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그러자 주인공 변호사를 비롯해서 대여섯 명 정도 되는 모든 동료 변호사들이 문병을 왔다가 아예 그 병상을 삥 둘러싸고 카드놀이를 하면서 밤늦게까지 오순도순 정겨운 대화를 나눕니다.
  그때 그 변호사들과 친분은 있지만 법정에서는 늘 그들과 반대편에 서게 되는 한 여검사가 멀리 창 너머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곁을 지나가던 다른 검사가 그 모습을 보고 “쟤네들 참 ‘특별한 그룹’(some group)이지?”라고 하자, 그녀는 “정말 그래.”하고 맞장구를 칩니다.
  비록 유명하지도 않고 주로 마약사범이나 매춘부들을 변호해 주면서 근근이 유지해 나가는 로펌이기는 하지만, 그처럼 각별하고 따뜻한 우애를 과시하는 ‘특별한 그룹’에 속해 있는 변호사들이 무척이나 행복하게 보였고 부럽기 짝이 없었던 것입니다.

  교회 역시 그처럼 ‘특별한 공동체 의식’을 소유하고 있는 성도들의 단체이지만, 지상교회라고 해서 다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 세계의 참된 기독신자들 또한 한 ‘우주적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인 것은 틀림없지만, 신자라는 이름만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런 ‘특별한 혈연’으로서의 사랑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겉으로는 비록 ‘흩어진 나그네’처럼 보이지만 오직 ‘중생 신앙’과 ‘예수 사랑’과 ‘성경 중심’의 신앙생활을 공유하고 있는 성도들만 ‘택하심을 받은 자들’의 참된 공동체에 속한 일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시절이나 현대교회에서나 ‘열방과 민족과 섬들’ 가운데 흩어져 있는 것이 지상교회의 현실이지만, 바로 이 세 가지 공통분모를 소유하고 똑같은 천당을 바라보면서 온갖 연단을 이겨내며 동질의 신앙생활을 나누는 교회만이 ‘하나의 우주적 교회’ 안에 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경향의 성도들도 다 이런 ‘행복한 신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경향교회가 이처럼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부러울 정도로 ‘자랑스러운 공동체’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대 천하를 호령하던 로마제국 앞에서 ‘흩어진 나그네’처럼 처량하고 미약하게 보였지만 실상은 ‘택하심을 받은 자들’로서의 확신과 자부심을 가졌던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중생 신앙으로써 천당 소망을 간직’하며 ‘예수 사랑으로써 모든 연단을 극복’하고 ‘오직 성경중심으로써 동질의 신앙생활’을 나눔으로써 바로 이 경향교회를 통해 ‘우주적 교회’에 속한 천국권속의 은총을 더욱 뜨겁고 강하게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