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2-26 “변명할 때에 함께 하는 자” 디모데후서 4장 1-16절 / 석기현 담임목사

More videos
271
Views
   

WMA음성받기MP3음성받기동영상다운받기동영상다운방법
2017′경향의 강단(10) (2017년 2월 26일 / 제네바 신대원 주일예배)
“변명할 때에 함께 하는 자” 디모데후서 4장 1-16절 / 석기현 담임목사

(271)

"변명할 때에 함께 하는 자"

디모데후서 4장 1-16절 / 석기현 담임목사
‘네이비실’(Navy SEALs)은 미국의 육해공군 전체의 특수부대들 중에서도 최고로 명성이 높은, 그야말로 정예 중의 최정예입니다.
  자연히 그 훈련도 지독하기로 악명이 높은데, 수 주간에 걸친 전 과정을 끝까지 수료하고 자랑스러운 네이비실의 마크를 달게 되는 비율은 지원자들 중 겨우 25퍼센트밖에 안될 정도입니다.
  특히 만 6일 동안 단 한 시간도 잠을 자지 못하는 가운데 식사시간 5분씩만 제외하고 밤낮으로 내내 강훈련을 받게 되는 ‘hell week’ 즉 ‘지옥주간’에 가장 많은 탈락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그 네이비실의 ‘hell week’에 대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는데, 진행자가 ‘이처럼 극단적인 훈련을 시키는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하자 그 훈련조교는 즉시 대답하기를 ‘나와 함께 실전에 나가게 될 때 내 생명까지 맡길 수 있는 대원을 찾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조교들은 훈련병들 중에서 ‘자기만 조금이라도 더 편해지려는’ 사람을 즉시 탈락시키고, 반면에 그처럼 정신적 육체적으로 극한 상황에 몰리더라도 ‘끝까지 전우애를 발휘하면서 협동하는’ 사람만 남겨 놓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런 전우를 간절히 찾고 있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순교를 앞두고 쓴 유서와 같은 서신입니다.
  그런 가운데 사도 바울에게 가장 괴로웠던 것은 결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바로 16절에서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라고 그가 가슴이 찢기는 듯한 심정으로 고백하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
란 말은 바울이 제1차 투옥되었을 때를 가리킬 수도 있고 혹은 지금 로마에서 두 번째 투옥된 후 재판을 받으면서 자기변호를 시작한 때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지 간에 요점은 처음에 그의 곁에 함께 있어 주던 사람들이 지금에 와서는 “하나도 없고” 다 그를 “버리고” 떠나 버린 현실이었습니다.
  아무리 사도이고, 아무리 순교까지 기꺼이 맞이할 각오도 되어 있는 바울이었지만, 그처럼 끝까지 자기 곁에서 위로하고 격려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동역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그것만큼은 정말 견디어내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록 16절 하반절에서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그들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악감정을 가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기는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처럼 자기를 떠나버린 사람들 때문에 그가 얼마나 외롭고 괴로웠는지는 그냥 직설법으로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세계 최강 특수부대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가장 중대한 자격이 ‘서로의 생명을 의탁하면서 죽을 때까지라도 함께 갈 수 있는 전우’인 것과 마찬가지로, 복음의 전선에서도 그런 동역자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그가 지극히 아끼던 후배 목사 디모데 한 명만이라도 ‘변명할 때 자기와 함께 하는 자’가 되어 주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것은 꼭 자신이 로마 법정에 서게 될 때에 곁에 같이 있어 달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신실하고 충성된 전도자’로서의 사명의 길에 ‘함께 하는 자’가 되어 달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서두에서부터 디모데에게 “1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즉 자기가 순교한 후에도 ‘전도자의 사명에 끝까지 함께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디모데 역시 반드시 지켜야 할 두 가지를 ‘엄중하게 명령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이제 이전의 ‘고려신학교’를 계승할 ‘제네바신학대학원’의 역사적인 첫 학기 개학을 앞두고 총회 산하 교회들이 ‘제네바신학대학원 주일’로 지키는 오늘에 저는 주신 말씀을 통해 이 선지학교가 앞으로 과연 ‘어떤 사명’을 위해 죽을 때까지라도 함께 할 전도자를 키워내게 될지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제네바 신학대학원은 ‘이단을 대항하여 성경 말씀대로 복음을 외칠 전도자’를 양성하는 ‘진리의 터’가 될 것입니다.

  본문 2절부터 4절에 “2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로 하여금 ‘함께 하는 자’가 되기를 원했던 첫 번째 내용은 곧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1절에서 본대로 바울이 ‘하나님,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의 나라 된 교회’를 두고 디모데에게 “엄히 명한” 실로 중차대하기 짝이 없는 사명이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진짜로 두려워하는 목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재림하셔서 사람들을 천당과 지옥으로 갈라놓으실 것을 진심으로 기다리고 있는 신학교수, 그리고 지상교회가 바로 그 주님의 영광스러운 왕국임을 확실히 믿고 있는 모든 신학생들에게 있어서 이 ‘복음 전파’란 그야말로 절대적인 최고 사명인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중요하고도 절대적인가 하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야” 할 정도입니다.
  이것은 복음 전파에는 ‘적절한 시기’나 ‘알맞은 기회’라는 것이 아예 없다는 뜻입니다.
  적당해 보이는 때나 좋은 결과가 예상되는 경우에는 물론이지만, 혹 부적당하게 보이는 때나 오히려 역효과가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즉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전도자는 무조건 복음 전파의 사명에 생애 최고와 전부를 투신해야 할 뿐인 것입니다.
  바로 그 뒤에 나오는 “범사에 오래 참음”으로 전파하라는 말씀이 곧 전도자가 맞이하게 된 시기나 당면한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불리해 보인다 할지라도 그저 ‘인내’하면서 무조건 복음을 전파해야만 함을 강조합니다.
  경우와 상황에 따라 때로는 “가르침”으로, 때로는 “경책” “경계”로, 하여튼 전도자는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전파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복음 전파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이 곧 미혹하는 이단을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진리를 순수하게 지켜내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허탄한 이야기” 즉 ‘이단 교리’야말로 최대의 대적이 될 것이라고 미리 경고해 준 이유가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허탄한 이야기’들은 마치 “귀가 가려운” 사람들의 귀를 시원하게 긁어 주듯이 듣는 사람의 구미에 딱 맞는 것인 까닭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처럼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잘 해 주는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들을 “많이 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때가 이르리니” 즉 말세로 가면 갈수록 절대다수의 대중은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떠나는 현상이 더욱 대세가 될 것이니, ‘바른 복음’은 상대적으로 점점 더 ‘비인기 종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런 까닭에 더더욱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고, 즉 남이야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로부터 그 어떤 냉대와 비난을 받든지 간에 무조건 “바른 교훈” “진리”만을 소리 높여 전파해야 한다고 디모데에게 ‘엄명’을 내렸던 것입니다.

  전도자에게 있어서 ‘복음 전파’는 예나 지금이나 부동의 ‘제일 사명’입니다.
  그래서 참된 개혁주의 교회의 삼표식 중 제일 먼저 나오는 것 또한 ‘바른 말씀의 선포’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단으로부터 진리를 구별해 내고 수호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씨’를 뿌려 놓으신 세상 밭에는 사탄이 밤에 몰래 뿌려 놓은 ‘이단의 가라지’가 반드시, 아주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소위 ‘우파 언론’에서는 그저 ‘양비론’ 일색입니다.
  좌파 언론은 철두철미하게 우파를 비난하고 좌파만 찬양하지만, 명색이 우파라는 신문에 보면 ‘우파나 좌파나 양쪽 다 잘못이 있다.’는 식의 기사만 뜨는 것입니다.
  그런 비평이나 논설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양쪽 다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는 말은 굳이 기사를 쓰지 않아도 모든 경우에 항상 통하는 ‘일반적 사실’일 뿐입니다.
  좌파 언론이 좌파 편만 드는 것처럼 우파 언론은 당연히 우파의 정당성을 내세우고 좌파의 모순을 비판해야만 그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의 ‘보수주의 기독교’는 그런 ‘양비론’에서도 한걸음 더 벗어나서 오로지 엉뚱한 ‘자아비판’ 일색입니다.
  우리나라의 장로교가 해방 직후부터 분열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자유주의 기독교’가 ‘이단 교리’를 퍼뜨리면서 ‘신사참배’까지 정당화시키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만을 고수하려는 목사들은 어쩔 수 없이 교단을 분리해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요즘 바로 그 ‘보수주의 장로교’의 후배 목사라는 사람들이 ‘우리가 장로교를 분리시킨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단을 비판하고 진리를 사수해야 할 쪽에 있는 목사들이 스스로 ‘겸손히 행한답시고’ 오히려 자기네 신앙 선배들에게 침을 뱉기만 하고 있으니 이 도대체 무슨 ‘망령된 꼴’입니까?

  이처럼 진리와 비진리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는 이상한 분위기가 오늘날 우리나라의 기독교 내에 급속히 퍼져가고 있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믿는다고만 하면 성경 말씀을 제멋대로 어떻게 해석해도 아무 상관없이 똑같은 신앙이라고 서로 인정해 주어야 하며, 그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만 하면 천당과 지옥을 믿든지 안 믿든지 간에 똑같은 기독교 신자로서 서로 존중해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합니다.
  실로 악을 악이라고 비판하지 않고 적을 적으로 규명하지 않으려는 아주 괴상한 회색분자들, 아니 그야말로 ‘적과 동침하는’ 배교자들이 오늘날의 목사들 중에, 신학교들 중에 점점 더 다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단을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목사와 교회와 교단이 오히려 이단처럼 취급되고 있는 형편인 것입니다.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을 진정으로 진리라고 믿는다면 당연히 ‘비진리’를 비판하고 대항하여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였던 평양신학교는 일제 때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가 1938년에 폐교 조치를 당했었습니다.
  그 후에 소위 조선신학교라는 것이 세워졌는데 이 신학교는 조선총독부의 비호를 받을 뿐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동이었습니다.
  그런데 해방 후에 남한의 장로교회들이 모여 ‘남부 총회’를 결성했을 때, 당시의 총대들은 이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그 조선신학교를 총회 직영 신학교로 결정해 버렸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출옥성도이셨던 한상동 목사님께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 교회를 저들의 손에 맡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시고 고려신학교를 세우셨습니다.
  남한의 장로교 전체가 하마터면 도매금으로 자유주의 신학에 넘어가기 직전에 바로 이 고려신학교가 설립됨으로써 ‘이단’을 대항하여 ‘진리’를 사수하는 신학운동이 계속 이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그때 다수의 장로교회들이 총회직영 신학교로 인정해 버렸던 조선신학교가 바로 요새 매년 석가탄신일만 되면 신학교 정문에다가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합니다.
 ’라고 커다랗게 플래카드를 달아 놓고 있는 현 한신대학교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이미 ‘선한 싸움’은커녕 백기를 흔들면서 원수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는 작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제네바 신학대학원은 이런 비겁하고도 줏대 없는 다수의 조류에 편승하기를 끝까지 거부하는 가운데 바로 고려신학교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여 오직 성경을 ‘절대주권자 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가르치고 전파할 전도자를 양성하는 실로 소중한 ‘진리의 터’가 될 것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제네바 신학대학원은 ‘종교개혁자의 전통을 따라 신행일치의 삶을 지킬 전도자’를 배출하는 ‘순교자의 고장’이 될 것입니다.

  5절 이하 8절의 말씀에 “5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6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전파 사명수행에 대한 어려움을 디모데에게 미리 경고해 주면서도,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격려했습니다.
  여기 “신중”이라고 번역된 말은 ‘정신을 차려서’라는 뜻입니다.
  그 어떤 반대에 부딪히고 고난을 당하더라도 항상 정신 똑바로 차리고 고생할 각오를 단단히 하는 가운데 진리를 사수해야 할 전도자의 직무를 반드시 완수해야만 한다고 강력하게 독려했던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또한 불가능한 일도 아닌 줄을 사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평생을 그렇게 살아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제”
란 ‘포도주 따위를 부어서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란, 바울 자신부터가 그처럼 복음 전파를 위해서 모든 것 다 바치고 살다가 이제는 자기 목숨까지 이미 순교의 제물로 내놓은 자리에까지 와 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의 “떠날 기약” 즉 세상을 떠날 날이 이미 지척에 다가와 있었습니다.
  그때까지의 전 일생을 통해 바울은 그저 남에게 설교만 한 것이 아니라 본인부터가 마치 몸소 전장에서 선두에 선 사령관처럼 복음의 최전선의 전투에 앞장서서 싸웠던 전도자였습니다.
  즉 그는 그저 말로만 믿음을 지킨 전도자가 아니라, 자기에게 맡겨진 ‘일, 직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아예 자기 몸을 내던지고 “선한 싸움을 싸운”, 그야말로 총탄이 빗발치듯 오가는 실전의 현장에서 앞장섰던 ‘전도의 야전사령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멋있게도, 바울은 자신의 “달려갈 길을 마칠” 때까지 단 한순간도 후퇴하지 않고 그 “믿음”의 전선을 굳게 “지켰던” 즉 문자 그대로 ‘사수’했던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순교적인 충성이 사도 바울에게 가능했겠습니까?
  또 어떻게 사도 바울이 그처럼 사랑하고 아끼던 후배 디모데에게 바로 자기처럼 똑같이 “고난을 받으며” 죽기까지라도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라고, 인간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차마 할 수 없는 비장한 엄명을 내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반드시 그가 얻게 되어 있는 최후 승리의 순간, 바로 그를 위하여 예비 되어 있는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의로우신 재판장”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싸움에서 이기고 승리한 자에게만 베풀어 주실 상을 자신이 받게 될 장면을 벌써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에게 확실하게 예약되어 있는 천당, 오직 이것만을 결승점으로 삼고 바울은 자기의 전 인생을 한눈팔지 않고 달려왔었습니다.
  자기 머리 위에 씌워지도록 정확한 사이즈로 이미 만들어져 있는 영광의 면류관, 이것을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수여받게 될 기쁨에 벅차서 그는 아무리 힘든 싸움이라도 거침없이 싸우고 이기면서 달려왔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그 영광스러운 상급이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똑같이 주어지게 될 것 또한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말은 디모데 역시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아들처럼 아끼는 디모데에게 ‘너도 나처럼 순교까지 당하게 되더라도 똑같은 싸움을 끝까지 싸워야 한다.’라는 실로 비장한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이지 영생의 구원과 천당의 상급을 믿는 신자는 그 어떤 싸움도 두려울 수가 없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현재의 고난은 장차 다가올 영광에 족히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재림과 최후의 대심판을 믿지 않는 목사들은 절대로 그런 순교를 하지 않습니다.
  예수 이름 가지고 금세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기독교의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니, 무엇 때문에 그 아까운 자기 목숨을 내어 놓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자유주의 목사들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서도 아무런 ‘신앙적 갈등’을 가질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순교할 이유도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목사들이 오늘날 역시 북한의 독재자에 대해서도 아무런 비판 한마디도 가하지 않고, 오히려 ‘민족 화합’ 따위의 미명을 내세우면서 뻔질나게 북한을 드나들고 김일성 동상 앞에서 절하고 광복절에 ‘김정일 만세’ 따위를 부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만약 북한이 또다시 남침을 해 온다면 이처럼 공산주의에 대하여 전혀 경각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대놓고 ‘종북좌파’ 노릇을 하는 목사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들의 선배가 옛날 일제와 손잡은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들 또한 김정은에게 굽실거리는 허수아비 목사가 되어 어용 기독교회를 만들 것은 그야말로 ‘뻔할 뻔 자’입니다.
  아니 대한민국이 북한을 흡수하여 평화통일을 이룩하게 된다고 해도, 바로 이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적 자유를 내세워서 무슨 ‘기독사회당’ 따위의 이름으로 창당을 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재건운동’에 매진할 목사들도 수두룩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미 ‘회색분자’의 단계를 넘어서서 ‘적색분자’가 되어 있는 정치목사들이 수두룩한 우리나라가 앞으로 이 악한 공산주의를 과연 어떻게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이지 이 민족이 혹시라도 또 한 번 공산주의와 정면으로 육탄대결을 벌이게 되는 날이 오게 된다면, 과연 어떤 목사가, 어떤 교회가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 이미 부어진 전제’처럼 여기고 순교의 각오로 맞서겠습니까?
  현대 최악의 무신론자이며 명백한 적그리스도 세력인 공산주의를 대항하여 과연 어느 신학교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칠 때까지’ 그 치열한 최전선에 마지막 한 명의 목사까지도 오직 ‘믿음을 지키며’ 순교자로 싸우다가 죽으라고 계속 투입시킬 수 있겠습니까?

  오직 천당을 믿는 목사만이 그 싸움을 싸울 수 있습니다.
  오로지 주님께서 주실 ‘의의 면류관’을 사모하는 신학교수와 신학생들만이 조금도 겁내지 않고 그 전투의 대열에 나란히 설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영생 구원, 영벌 심판을 믿는 교회와 성도만이 죽을 때 같이 죽더라도 그 전열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그 전투의 제일선에서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용감하게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절대로 패배하지도 않고 헛수고가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비록 이 지상의 교계에서는 사방으로부터 ‘우겨쌈’을 당하고 일방적으로 매도를 당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의로우신 재판장’께서는 오직 우리 편이 되어 주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숫자상 압도적인 열세로 몰리더라도, 우리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 사이즈까지 맞추어져 있는 ‘승리의 면류관’이 이미 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네바신학대학원은 바로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배 종교개혁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죽을 때까지도 신행일치의 삶을 지키며 선한 싸움을 싸울’ 복음의 야전사령관들을 수없이 배출해 낼 마지막 시대의 ‘순교자의 고장’이 될 것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일천년 동안 계속되었던 영적 암흑기를 깨뜨리고 종교 개혁자들이 바른 진리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날이 불과 오백 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소중한 개혁주의 신앙으로 시작되었던 장로교회가 오늘날에 와서는 천주교와 자유주의 기독교가 주도하는 종교혼합주의에 미혹당하여 걷잡을 수 없이 퇴색되고 있습니다.
  바로 백 년 전에 그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청교도 신앙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참된 복음을 전해 주었고,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일제의 신사참배와 공산주의의 유물론과 맞서 싸우며 ‘순교의 피’로써 이 땅을 물들였습니다.
  하지만 그 순교자 선배들 앞에 민망스러울 정도로 오늘날 조국의 기독교계에 온갖 이단들뿐 아니라 심지어 적과 내통하는 ‘종북좌파’ 목사들까지 들끓고 있는 형편입니다.

  정말이지 ‘끝까지 곁에 함께 할 동료’, ‘사선까지도 같이 넘을 수 있는 전우’ 한 사람이 극히 아쉬운 시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단과 싸우는 성경중심의 진리 운동, 천당소망을 가지고 죽도록 충성하는 신행일치의 운동을 위하여 함께 싸울 ‘같은 편’ 전도자 한 명이 너무나 필요한 때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너무 많은 신학교들이 세워져 있었고 너무 많은 신학생들이 배출되는 바람에 속된 말을 빌리자면 ‘어디를 가도 목사가 흔해 빠진’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필요 이상으로 넘쳐나는 것처럼 보이는 목사들’ 가운데서도 ‘진짜 목사’는 너무나 찾기 어렵습니다.
  사실은 ‘목사가 흔한’ 것이 결코 아니라 ‘그저 먹고 살기 위해 목사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삯군’들이 너무 많을 뿐이지, ‘정통 개혁주의 신앙에 따른 복음’을 외치며 ‘평화 시대에도 순교의 각오’로 충성하는 참된 선지자는 여전히 극소수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제네바신학대학원은 이처럼 조국전도와 세계선교를 위해 실로 소중하고도 꼭 필요한, ‘진실하고도 의리 있는 전도자’를 키워내기 위해 세워진 신학교입니다.
  바로 고려신학교의 교육이념을 그대로 계승한 제네바신학대학원의 설립이념이 그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 줍니다.
  이 신학교는 “신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과 본분에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고 그대로 가르치는”, 즉 ‘이단을 대항하는 진리의 터’가 될 것입니다.
  또한 이 선지학교는 “신전인격자로서 신학 및 생활을 순결케 할 교역자를 양성하는”, 즉 ‘신행일치의 삶을 지키는 순교자의 고장’이 될 것입니다.
  오직 ‘성경 말씀에만 근거한 진리’를 전파하며 ‘믿는 그대로 죽기까지 싸우는 행동’을 보여줄 진실하고도 충성스러운 전도자를 배출하게 될 이 귀한 제네바신학대학원을 위하여 더욱 기도와 헌금으로 후원함으로써, ‘복음을 위하여 변명하는 외로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참된 전도자들과 늘 함께 하고 끝까지 함께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