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2-19 “말에 온전한 자” 야고보서 3장 1-18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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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02-19
2017′경향의 강단(9) (2017년 2월 19일 / 주일 대예배)
“말에 온전한 자” 야고보서 3장 1-18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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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 온전한 자"

야고보서 3장 1-18절 / 석기현 담임목사
옛날에는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어야 말을 할 수 있고 들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듣고 싶지 않아도 그냥 어디를 가나 말, 말, 말이 봇물처럼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시대입니다.
  특히 요즘은 텔레비전 뉴스쇼 같은 데서 무슨 ‘패널’이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도대체 무슨 할 말들이 그리 많은지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 온종일 토론이라고 하는데, 제가 듣기에는 ‘뉴스’가 아니라 그냥 삼류 잡지에나 실릴 법한 온갖 루머와 억측들의 반복입니다.
  그런 식으로 ‘여론 재판’을 다해 놓고서는 ‘국민의 뜻’이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게다가 온갖 종류의 포털사이트와 SNS들은 대중 전체의 언어문화를 갈수록 저질화 시키고 있습니다.
  갖가지 신조어들과 맞춤법을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 문장들은 그저 애교에 불과하고, 욕설이 거의 표준말처럼 자리를 잡아가며 ‘카더라’는 소식이 순식간에 정설로 둔갑해 버리기 일쑤입니다.
  정말이지 지금의 대한민국은 ‘말의 홍수’ 아니 ‘말의 공해’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세상 사회만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야말로 예로부터 ‘말쟁이’라는 별명을 듣고 있으며, 교회야말로 어쩌면 ‘가장 말 많은 단체’로 손꼽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어쩌다 이런 부끄러운 일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실 이것은 오늘날에만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일찍이 초대교회 시절부터 이미 교회 안에 온갖 ‘말로 인한 문제’가 팽배하고 있었음을 바로 본문이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서의 저자인 야고보는 신약 성경에 동명인이 여러 명 나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인데, 그 외에도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가 있습니다.
  그 중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초대교회에서 별 영향력이 없는 인물이었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일찍 헤롯왕에 의하여 순교를 당했으므로(행 12:2), 이 야고보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것은 그가 예루살렘교회의 초대감독이 되었으며, 사도 바울 또한 그를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교회의 기둥’(갈 2:9) 같은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사실들을 보아서도 더욱 유력해집니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의 일선 지도자로서 교회 안에 생기는 온갖 문제들을 더욱 피부적으로 접하게 되었을 것인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곧 ‘말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교회가 그런 불명예스러운 오명을 벗고 우리 각 신자가 ‘말에 온전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 꼭 명심해야 할 두 가지 사실이 무엇인지를 본문에 기록된 야고보의 교훈을 통해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말을 잘하는 능력’보다 우선 ‘말을 제어할 줄 아는 능력’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1절부터 12절에 기록하기를 “1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2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3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4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5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8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1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2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1절에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서두에서부터 이 문제에 대하여 강한 어조로 훈계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선생’이란 바로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교사’를 뜻하는데, 초대교회 당시 ‘선지자’와 ‘사도’ 다음으로 중요한 직분이었습니다(고전 12:28).
  이들은 오늘날의 주일학교 교사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당시 사도들과 감독들의 숫자가 충분하지 못하던 시절에 평신도 중에서 교회의 성경공부도 인도하고 또는 여러 교회들을 돌아다니며 순회전도 활동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교사의 직분이란 신자로서 정말 ‘사모할만한 큰 은사’(고전 12:31)였던 것입니다.

  문제는 초대교회 안에서 그런 ‘교사로 자칭하는 교인’들이 너무 많이 생겼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원래가 유대 사회는 ‘선생’ 즉 ‘랍비’를 극도로 존경하는 사회였습니다.
  하지만 그 랍비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교육 과정과 객관적인 인정을 받아야만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바깥 사회에서는 되기도 어렵고 그 대신 존경은 많이 받는 ‘랍비’에 해당되는 직분이 교회 안에 오니까 바로 이 ‘교사’라는 직분을 통하여 훨씬 더 쉽게 될 수 있었습니다.
  무슨 신학교를 졸업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남보다 신앙 문제에 대하여 경험이 좀 많고 말만 잘하면 얼마든지 교사 행세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사회에서는 평균 수준도 안 되면서 교회 안에서 ‘그저 입만 가지고’ 선생 노릇하겠다는 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고, 그 결과 교회는 그런 ‘질이 떨어지는 교사’들 때문에 그야말로 ‘바람 잘 날 없는 단체’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는 “너희는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즉 ‘너희는 아무나 선생 되겠다고 나서서는 안 된다.’라고 단호하게 경계했던 것입니다.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라는 말은, 남을 가르치는 자에게는 더 막중한 책임이 주어지는 것이며, 그 책임을 제대로 감당했는지 아닌지에 대하여 나중에 예수님 앞에서 더욱 엄격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면서 야고보는 2절에서 신자에게는 그처럼 말 많이 하는 선생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밝히면서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했습니다.
  ‘말하는 재미에 스스로 빠진’ 선생이 아니라 그 반대로 ‘말에 실수가 없도록’ 노력해야 진정 훌륭한 신자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 ‘온전한 사람’, 문자 그대로 ‘완전하다고 불릴만한 신자’요, ‘온 몸도 굴레 씌울 수 있는’ 즉 자신을 스스로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는 인격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혀”야말로 온 몸의 지체들 중에서 가장 “길들이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인데, 3절부터 5절 상반절까지가 이 사실에 대한 예화들입니다.
  “말”
은 사람보다 훨씬 더 힘센 짐승이지만 그 입에 “재갈”이라는 작은 도구 하나를 물리기만 하면 마음대로 부릴 수 있으며, “배”는 엄청난 무게를 가진 것이지만 그 방향의 조정은 오로지 후미에 붙은 아주 작은 “키” 하나에 달려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혀’는 몸 전체에 비해 극히 “작은 지체”이지만 그것 하나만으로도 “온 몸을 제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큰 것을 자랑한다”
는 표현은 이 구절의 문맥에서는 ‘작은 것이지만 극히 광범위하고도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사람은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만 실수하지 않도록 잘 제어할 수 있으면, 자신의 인격과 품위를 지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큰 광풍 같은 위험을 자초하지 않고 미리 예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5절 하반절에서 12절까지는 그처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혀의 ‘위험성’을 일깨워 주는 내용입니다.
  우선 혀는 ‘온 몸을 더럽힐 수’ 있는데, 그것은 “작은 불” “많은 나무”를 순식간에 태워버리는 것과 같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마치 “지옥 불”처럼 한 개인의 “삶의 수레바퀴” 전부를 불살라 버릴 수도 있을 정도로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또한 혀는 ‘길들일 수 없을 정도로 쉬지 않는 악과 죽이는 독이 가득한’ 지체입니다.
  즉 통제되지 않고 그냥 방치되어 있는 독성물질이나 폭발물과 같아서 단 한순간에 본인의 성품을 망치고 교우 간의 우정을 파괴하며 심지어 타인을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크고 심각한 혀의 위험성은 9절 이하 12절에 나오는 대로 곧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외식적인 교인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통제되지 않은 혀는 ‘하나님을 찬송’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을 저주’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샘”
이나 열매 맺는 “나무”와 같은 자연계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일이지만, 오직 사람만은 바로 ‘혀’ 하나 잘못 놀림으로써 그야말로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그런 ‘두 얼굴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기독신자는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말을 적게 하는 것이며, 말을 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이 바로 말에 실수를 하지 않는 것임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즉 말을 더 잘하게 돼서가 결코 아니라 말을 더 아낄 줄 알게 되고, 말하는 재주가 늘어서가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자제력을 발휘함으로써 진짜 ‘신앙 좋은 신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Speech is silver, silence is gold.)라는 유명한 격언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튀어나오는 대로 말하기는 참 쉽지만, 그야말로 ‘엎지른 물’처럼 이미 입 밖으로 낸 말의 실수를 수습하기는 너무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한 번 거짓말을 하게 되면 그것을 변명하느라고 또 다른 거짓말을 계속 양산하게 되며, 심지어는 ‘말로 타인을 죽여’ 놓고도 스스로는 ‘입바른 소리 했다고’ 자찬에만 빠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9절에서도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한 것입니다.

  정말이지 우리는 언변의 기술이 아니라 먼저 말을 아끼고 말을 적게 하는 법부터 익혀야 합니다.
  유창하게 연설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스스로 입을 닫는 법을 진짜로 연습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코 ‘말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을 조심해서 제어할 줄 아는’ 사람이 됨으로써, 실로 교회 안에서 ‘참된 선생’으로 존경을 받고 세상 사회 앞에서도 칭송을 듣는 신앙인격자들이 꼭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정말 ‘말 잘하는 사람’은 곧 ‘속에 있는 지혜를 선한 행실로써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13절 이하 18절의 말씀에 “13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14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17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18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기독신자들은 어떻게 해야 ‘말에 온전한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히 알겠는데, 그렇다면 말의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놀랍게도, 이어지는 본문은 이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신자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한다.’라고 조금 전에 이렇게 구구절절 강조했으니, 이제는 당연히 ‘그렇다면 어떤 말을 어떤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어야 마땅할 것 같은데 그런 내용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성경은 ‘말에 온전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선포합니다.
  ‘지혜’라는 것을 일반적으로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정보를 알고 기억하는 것’ 혹은 ‘인생 경험에 의한 노하우의 축적’ 따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본문은 지혜에 대하여 실로 범상치 않은 정의를 내려 줍니다.
  바로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라면, 그 사람은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지혜의 온유함으로”라는 말은 ‘진정 지혜로운 사람답게 온유한 마음자세를 가지고’라는 의미입니다.
  즉 스스로 좀 안다고 교만에 빠진 사람은 ‘말만 많을’ 수밖에 없지만, 반면에 진짜 지혜가 있는 사람은 오직 겸손하게 ‘입을 닫고’ 그 대신 ‘선행’으로써 자신의 속에 있는 지혜를 나타낼 줄 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지혜에 대하여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정의가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듯이 ‘말을 잘하는 것’이 결코 참된 지혜가 아니라, 오로지 ‘행동을 선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지혜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14절부터의 말씀은 이 전자와 후자를 극적으로 대조하며 비교해 줍니다.
  ‘말만 잘하는 지혜’란 오로지 “땅 위의 것”일 뿐입니다.
  그런 ‘세속적인 지혜’만 가진 사람은 그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독한 시기와 다툼”을 말로써 “자랑”하는 교만에 사로잡히게 되며,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는 것을 밥 먹듯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처럼 ‘말뿐인 지혜’는 “정욕의 것” 즉 지극히 ‘말초신경적인 저질 지혜’이며 근본적으로 “귀신의 것” 즉 ‘마귀의 소리를 대언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말로만 똑똑한 체하는’ 교인들이 가득한 교회는 절로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끊일 새 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행함으로 보이는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따르는 “선행”을 나타내는 것이야말로 그 성도의 “마음 속”에 진짜 “지혜와 총명이 있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17절 이하에 보면 그처럼 “위로부터 난 지혜”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이어지는데, 거기에는 ‘말’과 관계되는 내용은 단 한마디도 없고 오로지 ‘행동’과 직결되는 내용뿐입니다.

  참된 지혜는 우선 “성결”을 통해 ‘눈에 보이게’ 됩니다.
  이것은 곧 ‘죄를 멀리할 줄 아는’ 삶을 가리키는데, 진정 ‘성화’의 과정에 있는 성도라면 이것이 그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화평”
은 ‘다툼이나 불화가 없이 늘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본인의 대인관계에서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 불화 중에 있는 다른 교인들의 관계를 화목 시키는 행위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관용”
이란 ‘타인을 너그럽게 포용해 주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즉 남의 말을 잘 들어주고 그들의 괴로운 감정과 약한 형편과 힘든 상황들을 이해해 주는 것입니다.
  “양순”
은 ‘순종적인 자세’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절대복종하고 또한 ‘교회의 관할과 치리’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full of mercy and good fruits)라는 구절은 두 단어가 나오지만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합니다.
  즉 다른 사람의 어려운 형편을 마음으로 불쌍히 여겨주는 ‘긍휼’에서만 그치지 않고 그들을 실제로 도와줌으로써 ‘선한 열매’를 많이 맺는 행위를 뜻하는 것입니다.
  “편견”
이 없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 또한 ‘말 많은’ 사람이 흔히 저지르는 일과 완전히 반대되는, 오직 ‘지혜의 온유함으로써 그 행함을 보이는’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일입니다.
  끝으로, “거짓”이 없다는 것은 아까 10절부터 12절에 나왔던 ‘위선’이 없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과 성도 앞에서 늘 진실하고 솔직한 자세만을 견지하는 ‘선행’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에 보면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고 조금 전에 언급했던 ‘화평의 선행’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만 잘하는 교인’과 ‘선행의 지혜를 나타내는 교인’ 사이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뚜렷한 차이가 바로 여기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즉 전자는 교회 안에서 온갖 ‘다툼’과 ‘불화’를 유발시키며 ‘편당’까지 만들기 십상이지만, 후자는 온 교우들을 ‘한 몸으로 지어져 가는 화목한 지체’들로 만드는 실로 아름다운 “의의 열매”를 생산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지혜와 총명’이 있는 사람은 바로 그것으로써 ‘좋은 말, 옳은 말, 바른 말’을 하게 된다고만 여기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바로 앞에서 ‘말조심’을 그토록 강조했으니, 여기서는 이제 ‘지혜로운 말을 하라.’는 내용이 따라와야 당연한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그런 흔한 교훈이 아니라 ‘진정 지혜로운 신자는 선한 행실을 통해서 자신의 지혜를 남들 앞에서 보일 줄 알아야 한다.’라고 실로 차원 높게 우리를 일깨워 줍니다.
  다시 말하자면, 신자가 말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말은 ‘말’이 아니라 바로 ‘선행’인 것입니다.

  실로 ‘신행일치에 따른 바른 행실’이야말로 참된 기독신자들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언어요 가장 훌륭한 웅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모든 교인들로부터 진심으로 존경을 받는 성도의 모습을 보면 금세 공감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지금 이 순간 우리 이 경향교회 안에서 가장 존경하고 있는 장로나 집사나 권사를 꼽아본다면, 그 분이 평소에 말 잘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저 몸으로 열심히 충성만 하는 사람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백이면 백 다 똑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실의 언어’로써 말할 줄 전혀 모르고 그저 ‘입술의 말’만 잘하는 교인들이 지상교회 안에는 아주 많습니다.
  그런 교인들은 자기 딴에는 꽤 지혜롭다고 크게 착각하고 있겠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자기 자신의 입조차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그냥 ‘땅 위의 것’, ‘정욕의 것’만 떠들어대고 있을 뿐입니다.
  아니 사실은 바로 사탄이 그처럼 ‘말하기 좋아하는 교인’의 입을 자신의 스피커로 사용하여 ‘귀신의 것’을 교회 안에 마음껏 퍼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이지 ‘혀의 바른 사용법’을 꼭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말을 잘하는’ 데에 있지 않고 오직 ‘올바른 행동을 보이는’ 데에 있습니다.
  오직 진실한 신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이 놀라운 언어, 곧 자신의 지혜와 총명을 입으로 내지 않고 오직 성도를 이롭게 하며 교회를 온전히 세우는 일에 충성을 다하는 ‘선행의 언어’로 말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국사든지 세계사든지 간에 훌륭한 성군이나 존경 받는 대통령이 ‘말 잘하는’ 사람인 경우가 단 한 번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런 위인들은 예외 없이 모두 다 ‘위대한 업적’으로써 말한 사람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에서는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교회 안에는 그저 ‘말로만’ 신자 노릇하는 교인들, ‘말로써’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직분자들이 참 많습니다.
  교회의 당회나 제직회에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말하는 재미에 빠진 장로나 집사들을 저도 미국에 있을 때 여러 한인교포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정말 자주 보았습니다.
  또 그런 사람일수록 주로 우리나라에 있을 때 보수적 교단의 교회에 몸 담았던 교인, 그리고 신앙경력이 오래 된 교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스스로 교회생활에 대해 무슨 뛰어난 노하우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자처하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교인치고 진심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늘 다른 성도들을 겸손히 섬기고 진짜 교회에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충성스러운 직분자치고 언변이 유창한 사람을 보았습니까?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저는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열변’을 토하는 교인일수록 평소에도 목사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가 되며 결국 교회를 욕하면서 떠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을 잘한다고 할수록 실상은 ‘말의 실수’가 더욱 많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소위 ‘입바른 소리’ 한다고 자처하는 교인일수록 정확하게 반비례해서 ‘행동의 언어’는 결코 나타낼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훨씬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렇게 말 잘하는 교인일수록 자신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높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스스로는 절대로 그렇게 깨닫거나 인정하지 않지만,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똑똑하다는 착각 아니 교만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오즈의 마법사’라는 소설에 보면 이런 대화가 나옵니다.
  주인공 소녀인 도로시가 “허수아비야, 너는 뇌가 없는데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니?”라고 묻자, 허수아비는 “글쎄요. 하지만 사람들도 자주 생각 없이 말을 하지 않아요?”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그냥 입으로 나오는 대로 내뱉는 교인, 선행으로써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지혜와 총명을 나타낼 줄은 모르고 그저 말만 앞세우는 교인, 그 무엇보다도 그 심령 속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이라고는 텅 비어 있는 상태에서 오로지 말초신경적인 마귀의 소리만 온 교회 안에 퍼뜨리는 교인이 있습니다.
  신자라 하면서도 그처럼 ‘뇌도 없이 말하는 사람’이 되면 그냥 ‘말의 실수’ 정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교회에 가장 큰 ‘해’를 끼치며 끝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죄’까지 범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결코 그런 신성모독의 죄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신 것’을 진정 두려운 마음으로 의식하는 신자라면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해야’ 할 뿐 아니겠습니까?
  성경 말씀이 ‘가라사대’라고 선포할 때 그것을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줄로 믿는 신자라면 ‘그저 경청하고 순종할’ 뿐이지 도대체 어떻게 감히 그 말씀을 도중에 끊고 자기 소리를 높일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말을 잘하는 능력’보다 스스로 ‘말을 제어하는 능력’부터 배우고 익히며, 또한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행의 언어를 잘하는 사람’이 됨으로써, 하나님과 교회 앞에 진정 ‘지혜와 총명 있는 선생, 말에 온전한 신행일치의 신자’로 나타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