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2-12 “물고기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요나 2장 1-10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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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경향의 강단(8) (2017년 2월 12일 / 주일 대예배)
“물고기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요나 2장 1-10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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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요나 2장 1-10절/ 석기현 담임목사
제가 어릴 때 무슨 어린이 잡지에서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살아난 포경선 선원’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사람이 고래의 위장 속에서 어떻게 호흡을 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그냥 지어낸 픽션일 것이라고 넘겨 버렸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혹시 하고 ‘검색창’을 열어 보았더니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고 당시 영국의 일간지에 삽화와 함께 기사로 실리기까지 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여부는 어떻든지 간에 하여튼 전해지는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1891년 2월에 영국의 포경선 ‘스타 오브 더 이스트’호가 남아메리카 근해에서 길이 13미터, 무게 31톤이나 되는 초대형 향유고래를 추적하게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고래에게 작살을 던지던 작은 보트들 중에 하나가 고래의 갑작스러운 수면 부상 때문에 전복되었는데, 거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 중에 제임스 버틀리라는 선원은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이 되어서야 드디어 잡아서 포경선에 끌어올리게 된 향유고래를 해체하던 도중에, 놀랍게도 그 내장 속에서 아까 실종되었던 제임스 버틀리가 신음하고 있는 모습으로 발견된 것입니다.
  그는 고래 뱃속에서 무려 15시간이나 생존해 있었던 것인데, 모든 체모가 다 빠지고 살갗도 하얗게 탈색된 기괴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고 약 한 달 동안 치료를 받은 후에야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제임스 버틀리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전복된 보트와 함께 수면으로 떨어진 후에 거대한 향유고래가 입을 벌리면서 자기를 삼키는 모습을 보았고, 고래의 작은 이빨들이 자기 몸을 씹을 때 칼에 찔리는 듯한 고통과 함께 목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는데, 그 안에서 따뜻한 소량의 공기를 느낄 수 있었지만 곧 내장이 수축하면서 정신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구약의 요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제임스 버틀리의 사건이 실화라면 그가 겪게 된 상황이 바로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된 후와 거의 비슷했을 것인데, 단 하나 결정적인 차이점은 요나는 그 속에서 ‘신음’만 하는 대신에 ‘기도’를 올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실 ‘물고기 뱃속’이란 ‘기도하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기도할 생각조차 하기 힘든’ 곳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극한 상황에서도 요나가 기도를 올릴 수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성도에게도 실로 귀중한 교훈이 됩니다.
  이 시간 저는 주신 말씀을 통해 ‘기독신자의 기도’가 어떤 놀라운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급박한 환난 중에서도 그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완전한 기도가 됩니다.

  본문 1절부터 3절에 “1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2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3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1장에서 요나가 선원들에 의하여 물에 던져진 직후에 그를 삼켰던 ‘큰 물고기’가 고래였는지 아니면 다른 큰 물고기였는지를 따지는 것은 사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요나가 사람을 삼킬만한 어떤 큰 물고기 혹은 물짐승의 뱃속에 들어가서 사흘 동안 생존할 수 있도록 초자연적인 기적을 베푸셨다는 사실입니다.

  하여튼 커다란 물고기가 아가리를 쩍 벌리면서 자기를 삼킬 때의 기분, 그리고 그 물고기의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서 위장 속에 갇히게 되었을 때 요나의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그것은 꼭 무슨 폐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라도 그야말로 최악의 공포 상태였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가 그 안에서도 죽지 않도록 호흡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고 물고기의 위액에 소화되어 버리지 않도록 기적적으로 보호해 주심으로써 생존은 할 수 있었지만, 그 사흘이 지나가는 동안 요나의 생활환경이라는 것은 어떠했겠습니까?
  어둡고 미끈거리고 답답하고 끈적끈적하고 게다가 꼼짝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불쾌지수 200’에 해당되는 장소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요나가 어떤 기도를 했습니까?
  2절 상반절에 보면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라고 했습니다.
  즉 물고기에게 삼켜 목구멍을 타고 빨려 들어가는 그 고통의 순간에 요나는 비명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것입니다.
  사실상 그것이 무슨 기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는 선지자가 아니라 그 어떤 신자라 해도 ‘아이구, 하나님!’(저 좀 살려 주십시오.)이라는 외마디만 본능적으로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 소리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대답해” 주셨습니다.
  요나가 그저 고통 때문에 거의 반사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그 다급한 비명을 하나님께서는 마치 ‘정식 기도’를 들으신 것처럼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2절 하반절에서도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라고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스올’이란 ‘음부’라는 뜻인데, 그야말로 지옥처럼 깜깜하고 괴로운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지내는 동안 요나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 안에서는 무슨 몸을 푸는 체조는 고사하고 팔다리 한 번 접었다 펴는 동작조차 전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저 물고기 뱃속에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주여, 주여’ 하면서 끙끙거리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그런 ‘신음’조차 완전한 기도의 “음성”처럼 “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유창하게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면서 기도하는’ 것을 두고 ‘기도를 잘한다.’는 말을 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들으시기에도 꼭 ‘잘하는 기도’가 되겠습니까?
  저는 하나님 편에서는 그저 당신의 자녀들이 “하나님 아버지!” 하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완벽한 기도로 받아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녀가 무슨 부탁을 하면서 말을 좀 더듬는다고 해서 그 아버지가 그를 청산유수 같이 멋있는 언변을 동원하는 다른 자녀와 차별을 하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택하신 자녀가 ‘하나님, 저 너무 힘들고 어렵습니다. 저를 좀 살려 주십시오.’라고 간구할 때 좀 문장이 안 맞고 좀 표현이 서툴다고 해서 ‘못하는 기도’라고 여기실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개척교회를 섬길 때 교회의 어른들을 모시고 미국 동부의 명승지를 돌며 ‘효도관광’을 다니던 중이었습니다.
  어느 식당의 주차장에서 도로로 진입하던 중이었는데, 왼쪽에서 오던 어떤 차가 갑자기 차선을 바꾸는 바람에 제가 급브레이크를 밟게 되면서 차 안에 있던 사람들의 몸이 다들 앞쪽으로 쏠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짧은 순간 뒷자리에 앉아 계시던 한 권사님이 “주여!”라고 아주 힘 있고도 큰 소리로 외치셨는데, 우리 모두는 그 소리 때문에 오히려 더욱 놀랐습니다.
  하지만 급박한 위험을 느끼게 된 순간 즉각 튀어나온 그 ‘주여’ 한마디는 그야말로 완벽하고도 훌륭하기 이를 데 없는 기도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기도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를 두고 염려할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문제는 오직 ‘내가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줄 아느냐, 모르느냐?’에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기만 하면 반드시 다 들어 주시지만, 이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결코 응답하실 리도, 들어 주실 이유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그 어떤 큰 고난이나 다급한 위험을 당하더라도 일단 하나님 아버지부터 부를 줄 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꼭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일단 기도를 올리기만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직통으로 상달됩니다.

  4절부터 7절의 말씀에 “4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5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6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7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그처럼 ‘큰 물고기의 뱃속’에 갇히게 된 후 조금 시간이 흐르면서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기적적으로 생존시켜 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선원들에 의하여 바다에 던져지던 순간에는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라는 생각 외에 다른 어떤 기대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까 3절에서 요나가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가 바닷물에 빠지게 된 직후의 느낌을 돌이켜보는 내용입니다.

  그처럼 깊은 물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던 요나의 뇌리에 스쳐지나간 마지막 상념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4절에서 요나가 회상하는 대로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요나는 그렇게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하기를”이라고 했듯이 그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여기서 요나가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해 주실 것에 대한 소망을 끝까지 잃어버리지 않고 기도했음을 뜻합니다.
  그는 자기가 바다에 던져지게 된 것이 ‘주의 목전에서 쫓겨나는’ 순간, 즉 자기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마땅한 징벌을 받는 순간인 것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완전히 절망하지는 않고 ‘성전’ 즉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서 성도의 기도를 받으시는 집’을 바라보면서 자기를 용서하시고 살려 주십사고 그야말로 죽기 일보직전까지 기도를 올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5절과 6절에서 요나가 말한 대로 그 차가운 ‘물’이 자신을 에워싸고 ‘바다 풀’에 몸이 감기는 것을 느끼며 ‘산의 뿌리’같이 깊은 해저로 떨어지는 가운데서 올렸던 기도였지만, 그 기도가 하나님의 귀에 분명히 들렸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땅이 빗장으로 가로막고 있듯이’ 헤어날 길이 없어 보였던 그 ‘깊은 죽음의 구덩이’에서 요나의 “생명” “건져”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지금 물고기 뱃속에서 바로 그 사실을 기억해 낸 요나는 그래서 7절에서 자신이 그처럼 의식이 남아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라고 감격에 찬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들도 ‘호랑이 굴에 잡혀 가더라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을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은 그야말로 ‘설혹 죽음이 눈앞에 닥쳐와도 기도만 하면 살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그 환난과 재앙이 자신이 받아 마땅한 벌로 주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와 구원을 받을 기회는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바닷물 속 깊은 곳조차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는 ‘성전’이 될 수 있었다면, 정말이지 우리의 목숨이 아직 붙어 있고 우리 입술이 움직일 수 있고 우리의 머릿속에 의식이 남아 있는 마지막 일초까지도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휴대폰이 참 편리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터지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도시 외곽으로 나가고 산골짝 깊이 들어갈수록 휴대폰 기지국의 전파나 와이파이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인데, 제 휴대폰은 그렇게 멀리 가지 않고 엘리베이터 안에만 들어가도 불통이 되기 일쑤입니다.
  고성능 무전기는 전 세계 어디에서나, 심지어 우주에서도 연락이 가능하지만 해수면 아래에서는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래서 현대의 최신식 원자력 잠수함이라 할지라도 사령부로부터 작전지시를 받기 위해서는 수면 위로 부상하든지 아니면 최소한 수면 바로 밑에서 얕은 수심을 유지하는 가운데 잠수함 뒤쪽으로 길게 늘어뜨린 안테나를 이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의 전파’가 ‘안 터지는 곳’이란 이 지구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것은 해수면 아래가 아니라 깊은 지하광산의 터널에서 올린다 하더라도 조금의 ‘잡음’도 섞이지 않고 ‘loud and clear’ 즉 ‘수신 상태가 극도로 양호하게’ 하나님의 귀에 들리게 됩니다.
  전파도 초속 30만 킬로미터라는 유한적 속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 화성에 가 있는 탐사선 ‘큐리오시티’(Curiosity)에서 데이터를 전송하면 지구에 도착하기까지 15분이나 걸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인류가 지구에서 수천수만 광년이나 떨어진 다른 은하계까지 설혹 진출한다 해도 거기서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 역시 ‘즉시’ 보좌 앞에 상달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야말로 빛보다 더 빨리 하나님께 전달되며 중간의 그 어떤 물질이나 시공간도 결코 방해할 수 없는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절대적 의사소통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기도를 올리기만 하면 바로 그 곳이 ‘아버지께 기도하는 집’ 곧 ‘성전’으로 즉시 바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도에게 기도드릴 수 없는 때, 기도드릴 수 없는 장소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면서, 비록 자기 인생이 걷잡을 수 없는 폭풍에 휩쓸려서 꼼짝없이 빠져 죽어가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끝까지 ‘성전을 바라보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그 어떤 최악의 일을 당할지라도 감사와 서원으로써 기도를 드리면 반드시 응답됩니다.

  8절 이하 10절에 기록하기를 “8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9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10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요나는 오직 참된 신자만 올릴 수 있는 신기하고도 놀라운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 곧 우상숭배자들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기도였습니다.
  그런 자들 역시 ‘기도’라는 것을 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린” 기도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상을 숭상하는 자들의 기도에는 오로지 ‘소원’만 있을 뿐이지 ‘이미 받은 복에 대한 감사’가 전혀 없음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요나의 기도는 어떠했습니까?
  9절에 보면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바다에 던져진 자신을 하나님께서 이처럼 기적적으로 살려 주셨으니 결국은 다시 물 밖으로까지 내보내 주실 것 또한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이미 베풀어 주신 구원에 대해서 물고기 뱃속에서부터 ‘감사의 제사’를 올리고 있었으며 나중에 땅위로 돌아가게 되면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꼭 수행하겠다고 ‘서원’까지 올리면서 기도했었습니다.
  바로 그 ‘감사와 서원’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물고기에게 말씀”하셔서 “요나를 육지에 토해” 놓도록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종교인들의 기도에는 이런 ‘감사와 서원’이라는 것이 전무하지 않습니까?
  기독교를 제외한 타종교에서의 기도란 그냥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령님께 비나이다.’라고 하면서 ‘아들 낳게 해 달라, 비 내려 달라, 돈 잘 벌게 해 달라.’는 소원 나열이 전부입니다.
  그 형식이야 무당의 살풀이든지, 새벽에 정화수를 떠다 놓고 손을 비비든지, 불상 앞에서 삼천 배를 하든지 간에 본질적으로는 다 그런 식으로 ‘어린아이의 떼쓰는 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신자의 기도는 그런 유치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반드시 들어가는 차원 높은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미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인사조차 드리지 않으면서 또 다른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사람 사이에서도 그 얼마나 무례한 일입니까?
  그뿐 아니라 지금 자신이 올리고 있는 간구에 대해서도 꼭 응답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다면 ‘이미 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미래의 축복에 대한 서원’ 또한 필연적으로 포함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서원을 무슨 ‘give and take’ 식으로 받아서가 아니라 오직 그렇게 서원하는 진실한 자세를 기쁘게 보시면서 그 기도를 들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전화나 문자를 보내었는데도 아무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경우를 두고 ‘씹힌다.’고 합니다.
  물론 속어이기는 하지만 상대방으로부터 그처럼 무시당할 때의 기분을 아주 적나라하게 잘 표현해 주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와 서원’과 함께 올리는 경우는 그렇게 ‘씹히는’ 경우가 절대로 없습니다.
  ‘알라딘의 요술램프’는 딱 ‘세 번’만 소원을 들어 주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성도가 그처럼 진실한 기도를 올릴 때마다 항상, 어김없이 내려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자의 기도와 성도의 기도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감사가 없이 그냥 소원만 나열하는 기도는 그저 ‘신에게 투정부리는’ 행위에 불과하며 그것이 자기 원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 곧바로 불만과 의심으로 직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응답의 확신에 따른 서원이 빠진 기도란 그야말로 ‘신과 흥정하는’ 식의 건방지고 교만한 행태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신자는 기도를 ‘간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감사가 없는 기도는 ‘배은망덕’의 행위이며, 서원이 없이 올리는 기도는 ‘응답의 확신이 없는 불신앙’의 죄를 짓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실로 ‘감사와 서원’이야말로 자신의 기도를 완결판으로 만들어 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최악의 일을 당하고 있을 때에도 ‘이미 베풀어 주신 은혜’를 먼저 기억하고 또한 ‘장차 반드시 응답해 주실 복’까지 굳게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주일학교에 다닐 때 어떤 공과책에서 요나가 고래 뱃속에 촛불을 켜 놓고 꿇어앉아서 기도를 드리는 그림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저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설사 양초와 성냥을 구할 수 있었다 손치더라도 어떻게 촛불을 켤 수 있었겠으며 또 그 안에서 꿇어앉는 자세를 취할 수 있었을까 하고 ‘의심’이 생겼지만, 혹 주일학교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을까봐 질문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두말할 것 없이 요나의 실제 상황은 결코 그럴 수 없었고 오직 ‘깜깜하고,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이 완전히 밀폐된’ 공간일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그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에 십년을 다녀도 여전히 자기 입으로 한마디의 기도도 할 줄 모르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저 예배시간의 공기도에 ‘아멘’만 겨우 하고 심방 온 교역자의 기도를 ‘받는 것’만 할 줄 알지 스스로 ‘아바 아버지’를 불러 볼 줄은 모르는 정말 희한한 교인들이 꽤 많은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라는 것이 그런 교인들의 생각처럼 그렇게 어려운 일은 결코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기만 해도 충분하고 완벽한 기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북빙양에서 대게잡이를 하는 미국 어부들의 실제 조업활동을 취재한 다큐멘터리에서 이런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 중의 한 선장은 아주 독실한 기독신자인데, 어느 시즌의 대게잡이 작업 도중에 같은 어장에 있던 어선 한 척이 예고 없이 닥친 큰 파도에 전복되어서 승선하고 있던 어부 전원이 사망했다는 무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선장은 즉시 자기 어선 갑판에 있는 마이크를 켜고서 동료 선원들과 함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주님, 비록 불의의 사고였지만 우리가 이런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의심하지 않게 해 주옵소서. 왜냐하면 당신께서 행하시는 일은 항상, 모두 다 선하고 옳은 일일 뿐이기 때문이옵니다.
  그리고 그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이 비록 불신자들이기는 했지만 마지막 순간에라도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기만을 간절히 소원합니다.
  왜냐하면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이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기도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선장의 기도에 엄청난 충격과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약 제가 그 상황에 처했더라면 과연 그런 기도가 나올 수 있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평소에 사귀고 지내던 동료 어부들이 그런 비극적인 재난을 당한 것을 두고 여러분이라면 과연 어떤 기도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 선장은 너무나 놀랍게도 ‘원망’ 대신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의로우신 절대주권’을 찬양했으며 무슨 ‘불운’을 탓하는 대신에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구원’을 고백했던 것이었습니다.

  진실한 신자의 기도란 이처럼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들의 기도와는 아예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 기독신자는 다급한 상황에서도 ‘비명’을 터뜨리는 대신에 ‘기도’하며, 엄청난 재앙을 당하더라도 ‘저주’를 발하는 대신에 ‘주여!’를 외칩니다.
  ‘물고기 목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도 ‘하나님!’ 하고 외칠 수 있는데, 아무리 바쁘고 급하다고 해서 하루 몇 분만이라도 기도를 못하겠습니까?
  최악의 고문을 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물고기 뱃속’에서도 ‘감사와 서원’의 기도를 올릴 수 있는데, 하물며 비가 좀 내린다고 날씨가 좀 춥다고 해서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것이 뭐 그리 힘든 일이겠습니까?
  위급할수록 일단 ‘하나님’의 이름부터 부르고, 아무리 절망적인 때에도 끝까지 ‘아버지의 집’을 바라보며, 당장은 최악의 환난에 처해 있더라도 오직 ‘감사와 서원’의 간구를 올림으로써 그 모든 기도에 반드시 응답 받는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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