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2-05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에스겔 14장 1-23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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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실황 2017-02-05
2017′경향의 강단(7) (2017년 2월 5일 / 주일 대예배)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에스겔 14장 1-23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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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에스겔 14장 1-23절/ 석기현 담임목사
현대인들이 지적으로는 점점 더 똑똑해지는 것 같지만 실상 영적으로는 더욱 어두워지고 있다는 대표적인 증거가 ‘점쟁이’들이 날이 갈수록 번창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주 좋게 말해 주어서 ‘미신’에 불과하며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사기행각’이나 다름없는 점술에 사람들이 그토록 빠져드는 이유는 바로 ‘자기에게 닥칠 미래에 대해서 미리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의 본능적 욕구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점쟁이를 찾아다니는 사람마다 실제로 듣고 싶어 하는 말은 오로지 ‘좋은 점괘’일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사실 ‘액운’만 잘 봐 준다고 소문난 점쟁이는 없지 않습니까?
  소위 ‘용하다는 점쟁이’는 백이면 백 다 ‘그 점쟁이 말대로 애 낳았다더라, 사업에서 대박 터졌다더라,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더라.’는 따위의 소문이 따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선지자를 찾아가면서도 그와 똑같은 심정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본문 1절에 “1이스라엘 장로 두어 사람이 나아와 내 앞에 앉으니”라고 기록했는데, 이 “이스라엘 장로 두어 사람”이란 다른 유다인들과 함께 바벨론에 살고 있던 장로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포로 생활 중에 있는 민족의 장래와 조국 회복의 가능성 등에 대해 에스겔 선지자에게 물어 보려고 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7절 하반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7b자기를 위하여 내게 묻고자 하여 선지자에게 가는 모든 자”라고 언급하시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자기를 위하여’라고 강조되었듯이 이들은 선지자를 찾아오면서도 철저하게 자기중심적, 인본주의적 기대를 가지고 왔던 자들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인생이 어떻게 풀릴지, 어떤 좋은 일이 벌어지게 될지를 듣고 싶어서 선지자를 찾아가는 사람이란 본질적으로 점쟁이 앞에 가는 사람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시간 저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각 개인에게 반드시 벌어질 미래에 대해 정확하게 예언해 주시는 두 가지 사실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끝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인’은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2절부터 11절에 기록하기를 “2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3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4그런즉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그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고 선지자에게로 가는 모든 자에게 나 여호와가 그 우상의 수효대로 보응하리니 5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 그 우상으로 말미암아 나를 배반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이 마음먹은 대로 그들을 잡으려 함이라 6그런즉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려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 7이스라엘 족속과 이스라엘 가운데에 거류하는 외국인 중에 누구든지 나를 떠나고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고 자기를 위하여 내게 묻고자 하여 선지자에게 가는 모든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친히 응답하여 8그 사람을 대적하여 그들을 놀라움과 표징과 속담거리가 되게 하여 내 백성 가운데에서 끊으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9만일 선지자가 유혹을 받고 말을 하면 나 여호와가 그 선지자를 유혹을 받게 하였음이거니와 내가 손을 펴서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그를 멸할 것이라 10선지자의 죄악과 그에게 묻는 자의 죄악이 같은즉 각각 자기의 죄악을 담당하리니 11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시는 미혹되어 나를 떠나지 아니하게 하며 다시는 모든 죄로 스스로 더럽히지 아니하게 하여 그들을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려 함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찾아온 장로들에게 에스겔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라는 말로써 입을 열었습니다.
  이것은 선지자의 사역이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대로 ‘본인의 신통한 능력으로 무언가를 예견해 주는 것’이 결코 아님을 천명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선지자는 세상의 점쟁이들과는 달리 순전히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전달해 주는 대언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의 입을 통해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답해 주신 첫마디는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우상”은 ‘하나님 외의 다른 모든 신들’을 총망라하는 명칭입니다.
  그 ‘우상’ 앞에 “자기”라는 수식어가 있는 것은 그처럼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은 모두 다 예외 없이 종교생활마저도 오로지 ‘자기중심’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욕심’을 만족시켜 주고 ‘개인의 소원’을 성취시켜 줄 신만 찾다보니 절로 ‘우상’ 즉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낸 신’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라고 한 것은 우상숭배란 근본적으로 ‘마음이 어느 쪽으로 가느냐?’의 문제임을 가리킵니다.
  이 ‘들이다’라는 동사는 ‘가져오다’ 혹은 ‘좋아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바로 사람의 마음이란 ‘하나님’ 아니면 ‘우상’ 이 둘 중의 하나만을 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5절 상반절의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 그 우상으로 말미암아 나를 배반하였으므로”라는 말씀 역시 ‘우상숭배’는 곧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과 동의어나 마찬가지임을 명백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죄악의 걸림돌”이라는 말을 직역하자면 ‘넘어지게 만드는 죄악’입니다.
  그래도 명색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 즉 ‘선민’이라 자부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마저 걸려서 넘어지게 만든 무서운 죄악이 바로 우상숭배였던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를 태연히 저지르고 있으면서 자기네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물어오는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백성들의 뻔뻔스러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3절 하반절에서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고 어처구니없어 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의 번역이 조금 애매하게 되어 있는데, 원래의 문장은 ‘이미 우상을 자기 마음에 두고 죄악에 걸려 넘어져 있는 자들이 나를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될 일이냐?’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우상숭배자에게 남아 있는 미래란 “나 여호와가... 그 사람을 대적하여... 내 백성 가운데서 끊으리니”라는 단 한 가지밖에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가운데서 끊어 버리신다.’는 것은 ‘구원 받을 자’들 중에서 제외시킨다는 뜻이며 ‘그 사람을 대적한다.’는 것은 곧 당신의 원수인 마귀와 함께 반드시 ‘영벌의 지옥’에 떨어뜨리실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 무서운 저주를 피할 수 있는 길은 바로 6절 말씀대로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려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즉 ‘신앙 회복’만이 ‘불신앙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우상숭배자들이 하나님께 물어 볼 것이 있다고 선지자를 찾아오는 것만 해도 하나님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기가 막히게도 그런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말’로 대답해 주는 거짓 선지자들이 또한 있었습니다.
  바로 9절에서 “만일 선지자가 유혹을 받고 말을 하면”이라고 언급된 자들인데, 곧 이어서 “나 여호와가 그 선지자를 유혹을 받게 하였음이거니와”라고 하신 것은 그런 거짓 선지자조차 ‘악인도 악한 날에 쓰기에 적당하도록 지으신’(잠 16:4) 하나님의 절대주권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악에 대한 징벌을 면치 못할 것은 변함없기 때문에 “선지자의 죄악과 그에게 묻는 자의 죄악이 같은즉 각각 자기의 죄악을 담당하리니”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우상숭배자들과 그런 우상숭배를 죄악이라고 선포하지 않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공히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영원히 끊어지는 징벌’을 내리심으로써 “이스라엘 족속이 다시는 미혹되어 나를 떠나지 아니하게 하며... 그들을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우상숭배자’냐 아니면 ‘여호와 신앙인’이냐 하는 것만이 전 인류역사를 통틀어 나라와 민족을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저주 받을 백성과 구원 받을 백성을 나누시는 유일한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와 꼭 마찬가지로 ‘우상숭배’ 곧 ‘불신앙’이야말로 ‘인간이 스스로를 더럽히는’ 제일 심각한 죄이며 ‘하나님의 필연적인 진노와 저주를 불러오는’ 가장 큰 악입니다.
  인간사회가 ‘죄’라고 규정하고 처벌하는 것은 대부분이 다 ‘말과 행위의 죄’입니다.
  즉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든지 아무 상관없지만, 어떤 언행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게 되는 경우에만 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정의하는 죄는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든 언행뿐 아니라 그 마음속의 생각까지도 정확하게 살피시며, ‘악한 마음이야말로 악한 언행을 유발시키는 원인’(마 12:34)이라고 정확하게 진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눈에 ‘가장 악한 마음’이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상숭배의 죄는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온갖 죄들 가운데서도 최악의 죄이며, 사람의 심령을 하나님 신앙으로 이끌어 주려는 성령님의 역사를 끝까지 거부하는 죄이기 때문에 유일하게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마 12:31) 죄가 되는 것입니다.

  ‘불신앙이야말로 스스로 더럽히는 죄 곧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추악해지는 죄이다.’ - 이것이 하나님의 형법 제1조입니다.
  ‘불신자는 반드시 지옥영벌을 받게 된다.’ - 이것은 무슨 인간의 운명이나 자연법칙 따위가 아니라 절대주권자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불변의 ‘죄형법정주의’ 원칙입니다.
  행위의 죄는 신자가 된 후에도 자칫 저지를 수 있고 또한 얼마든지 용서 받을 수 있지만, 사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는 반드시 엄중한 영벌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오직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받은 자’만 구원을 받게 됩니다.

  12절 이하 23절에 “12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3인자야 가령 어떤 나라가 불법을 행하여 내게 범죄하므로 내가 손을 그 위에 펴서 그 의지하는 양식을 끊어 기근을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나라에서 끊는다 하자 14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15가령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 다니게 하여 그 땅을 황폐하게 하여 사람이 그 짐승 때문에 능히 다니지 못하게 한다 하자 16비록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만 건지겠고 그 땅은 황폐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가령 내가 칼이 그 땅에 임하게 하고 명령하기를 칼아 그 땅에 돌아다니라 하고 내가 사람과 짐승을 거기에서 끊는다 하자 18비록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19가령 내가 그 땅에 전염병을 내려 죽임으로 내 분노를 그 위에 쏟아 사람과 짐승을 거기에서 끊는다 하자 20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내가 나의 네 가지 중한 벌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전염병을 예루살렘에 함께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중에서 끊으리니 그 해가 더욱 심하지 아니하겠느냐 22그러나 그 가운데에 피하는 자가 남아 있어 끌려 나오리니 곧 자녀들이라 그들이 너희에게로 나아오리니 너희가 그 행동과 소행을 보면 내가 예루살렘에 내린 재앙 곧 그 내린 모든 일에 대하여 너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23너희가 그 행동과 소행을 볼 때에 그들에 의해 위로를 받고 내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모든 일이 이유 없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라고 한 것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는 그의 설교가 여기서부터 ‘두 번째 대지’로 넘어가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가령 어떤 나라가”라고 하신 것은 지금부터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이 어느 시대, 어느 장소, 어느 경우에나 다 똑같이 적용되는 일반적 원칙임을 뜻합니다.
  “불법을 행하여 내게 범죄하므로”라는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기준과 법에 어긋나는 범죄’를 저지른 경우를 가리키며, “그 의지하는 양식을 끊어 기근을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나라에서 끊는다 하자”라는 말씀은 그 죄로 인하여 ‘완전한 멸망’의 징벌을 받게 됨을 뜻합니다.
  즉 여기까지는 아까 11절 이전까지에 언급된 내용을 요약 정리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4절부터 2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죄에 대한 심판’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몇 차례나 강조하고 계십니다.
  “가령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 다니게 하여”, “가령 내가 칼이 그 땅에 임하게 하고”, “가령 내가 그 땅에 전염병을 내려”라는 말씀은 아까 ‘가령 어떤 나라에 기근을 내려’와 똑같은 의미의 비유를 반복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고 천명하셨습니다.
  우선 여기서 “공의”(公義, justice)라고 번역된 말은 ‘타인에 대하여 정당하게 행사하는 의’를 가리키며 주로 하나님께 적용되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냥 한글개역번역에 있던 그대로 ‘의’(righteousness)라고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더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용서 받고 구원을 얻게 해 주는 ‘의’란 그 어떤 경우에도 ‘본인이 쌓은 의로움’이 될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칭의’(롬 3:22)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심지어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에게조차 결코 예외가 아니었으니만큼(롬 4:3), 본문에서 ‘자기 생명을 건지게 해 주는 의’ 역시 바로 이 ‘칭의’를 가리키는 것이 명백합니다.

  하여튼 ‘노아, 다니엘, 욥’은 구약에서도 특별히 ‘의인’으로 명성이 높은 대표적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그 세 사람조차 ‘자기의 의’로 오직 ‘자기 한 사람의 생명만 건질’ 뿐이지 결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서 같이 구원 받게 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철저한 원칙인지는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14, 18, 20절)고 반복 강조한 말씀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당대에 완전한 의인’(창 6:9)이었던 노아도 동시대 사람 중 단 한 명도 구원을 받게 하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 가운데 아무도 120년에 걸친 노아의 전도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제국으로부터 바사 제국에 이르기까지 계속 최고위 관직에 있으면서 포로생활 중에 있던 유다인들에게 정치적으로는 많은 도움을 베풀어 주었겠지만 본인의 ‘의’를 그 동포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영적 구원’을 받도록 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욥으로 말하자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욥 1:1) 실로 모범적인 의인이었지만, 그의 아내조차 그 덕을 조금도 보지 못하고 그녀 자신의 불신앙(욥 2:9)에 따른 영벌을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21절 이하에 보면, 그 네 가지 재앙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전염병”을 동시에 “예루살렘”에 내린다 할지라도 “그 가운데에 피하는 자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끌려 나오리니”라는 말씀은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유다가 망한 후에도 생존하여 바벨론 포로가 된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을 가리켜 “곧 자녀들이라”고 한 것은 비록 포로민이기는 했지만 그들이 곧 ‘이스라엘의 명맥을 이을 후손’이라는 의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런 ‘남은 자’를 살려 두지 않으셨더라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단 한 명도 남지 않고 몽땅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기적적인 생존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덕분일 뿐이었습니다.
  즉 구원은 조금이라도 사람 쪽에서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100퍼센트 전부 다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무서운 재앙에도 불구하고 22절 하반절에 “너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엄중한 심판 중에서도 여전히 ‘무한한 인자하심’을 발동시켜 원래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들 가운데서 ‘그 사망 형벌을 피하게 되는 자’를 남겨 주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전심으로 감사 감격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또한 “내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모든 일이 이유 없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알리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이 양자의 당위성에 대해서 전적으로 인정하게 됨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심판’은 곧 ‘불신자에게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내려지는 당연한 결과’이며 동시에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은 성도가 거저 누리게 되는 은혜’인데, 이것은 결코 서로 ‘양도하거나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 정말이지 달리 해석할 길이 없는, 간단명료하기 이를 데 없는 하나님의 선포가 아닙니까?
  이처럼 성경이 명명백백하게 증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에서는 어처구니없게도 ‘다른 사람의 의를 나누어 받아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소위 ‘공로의 보고’(treasury of merit)라는 교리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천주교는 ‘이행득구’ 즉 ‘선한 행실의 공로를 많이 쌓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문제는 그 ‘구원 받기에 충분한 선행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그것이 무슨 ‘절대적 기준’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상대적 기준’에 따른 것인지는 교황조차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구원의 커트라인을 통과할 수 있는 선행의 양’이 어디엔가 있기는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그 기준을 초과달성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슬아슬하게 탈락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초과달성’한 사람, 천주교에서는 바로 ‘성인’들이 여기에 해당되는데, 그들에게는 본인의 구원을 받는 데 필요한 분량 외에 ‘잉여 선행’이 자연히 남게 됩니다.
  그것은 그냥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것이니까 ‘공로의 보고’라는 데에 무슨 ‘은행 저축’처럼 차곡차곡 모아두었다가 구원 받을 공로가 모자라는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입니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그 ‘공로의 보고’에는 그런 ‘성인들의 공로’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도 ‘같이 저장되어’ 있는데, 거기서도 한술 더 뜬 어처구니없는 소리는 그 ‘공로의 보고’를 열어서 필요한 사람에게 마음대로 나누어 줄 수 있는 ‘열쇠’ 즉 ‘권세’가 바로 교황에게 있다는 주장입니다.
  ‘성인의 의를 나누어 받아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이미 성경을 명백히 거스르는 교리인데 심지어 ‘그리스도의 대속공로까지 교황이 나누어 줄 수 있다.’고 하니, 이런 천주교가 이단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그 누가 뭐라 해도 구원은 철두철미하게 ‘개인적’ 문제일 뿐입니다.
  ‘바른 복음 진리를 지키는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며, 개혁주의 신앙의 계보를 잇는 ‘정통 교단’에 속해 있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게 되는 것도 절대로 아닙니다.
  아버지가 ‘이스라엘의 장로’라 하더라도, 목사의 자녀라 하더라도 무조건 구원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본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칭의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이 경향교회의 등록교인이라 할지라도 마지막 백보좌 심판대 앞에서는 어이없이 ‘슬피 울며 이를 갈면서 지옥불에 떨어질’ 사람이, 정말 극소수이기만을 간절히 바라지만,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세례 받을 때의 신앙고백이 사실 진심이 아니었다면 그의 속사람은 여전히 ‘중생’을 받지 못한, 즉 ‘그리스도의 대속 보혈의 공로로써 의롭다 인정함’을 받지 못한 사람이며, 그런 ‘칭의’가 없는 죄인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구원 받을 자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소수’입니다.
  하지만 비록 소수일지라도 반드시 ‘남은 자’가 있다는 사실 또한 변함이 없으며, 그 귀중한 구원을 얻게 해 주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일 뿐이라는 사실을 굳게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아주 간단명료한 진리입니다.
  즉 ‘예수 구원, 불신 지옥’ - 이것이야말로 각 개인에게 예외 없이 적용될 불변의 사실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는 바로 그 ‘사함을 얻지 못할 죄’ 때문에 반드시 지옥의 영벌을 받게 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칭의를 입은 신자’만이 바로 그 ‘십자가 대속의 공로’ 덕분에 천당의 구원을 받게 됩니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이 원칙에서 벗어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으며, 죽은 후에는 반드시 이 둘 중의 하나에 해당되는 내세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인류역사의 미래에 대하여 100퍼센트 들어맞게 되어 있는 가장 정확한 예언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최후의 대심판’이 아직 임하지 않은 이때에, 아직까지는 ‘은혜 받을 만한 때’가 연장되고 있는 이 소중한 기회에 부지런히 ‘전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특히 육신적으로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전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라 할지라도, 아무리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내 아들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얻는 칭의’를 받지 못하면 달리 구원받게 할 길이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죽마고우 같은 친구’나 ‘먼 친척보다 더 가까운 이웃’이 아직 불신이라면 당연히 그들을 만날 때마다 전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금세에서는 ‘같이 죽고 같이 살 만큼’ 돈독한 정분을 나누는 사이일지라도 내세에 가면 ‘결코 서로 건너오고가고 할 수 없는 큰 구렁텅이’(눅 16:26)가 천당과 지옥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전도자’야말로 세상의 그 어떤 예언자와는 상대도 안 될 최고의 ‘선지자’이며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을 살려 주는 실로 ‘위대한 인물’인 것입니다.
  오늘도 ‘자기를 위하여 묻고자 거짓 선지자를 찾아다니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이처럼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나는 전도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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