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1-29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사도행전 3장 1-10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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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01-29
2017′경향의 강단(6) (2017년 1월 29일 / 주일 대예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사도행전 3장 1-10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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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사도행전 3장 1-10절/ 석기현 담임목사
아마 우스개로 지어낸 것이겠지만, 제가 옛날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조폭 두목이 무슨 병에 걸렸는데, 찾아간 의사마다 치료가 불가능하다며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한 용한 의사를 만나게 되어 기적적으로 완치가 되었습니다.
  너무나 고마웠던 그 조폭 두목은 의사에게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면서 “제가 달리 이 은혜를 갚을 길은 없지만, 혹시 이 동네에서 선생님을 힘들게 하거나 괴롭히는 사람을 앞으로 만나게 되거든 그저 제 이름 석 자만 대시면서 아는 사람이라고 하면 아무도 못 건드릴 겁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그 이름은 바로 그 조폭이 직접 간접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 내지는 힘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 조폭의 경우는 어디까지나 불법적인 폭력에 근거한 것이지만, 실제로 세상에는 한 사람의 이름 뒤에 여러 가지 형태의 능력이나 권력이 따라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인데, 오늘 본문이 그것을 아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앞서 사도행전 2장 43절에 보면 예루살렘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이유 중에 하나가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본문은 바로 그 많은 이적들 중에 대표적인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내용으로서, 출생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고쳐 준 유명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그 앉은뱅이는 단지 불구의 몸만 치유 받은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마음까지 변화되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온 백성이 ‘심히 놀랄’ 수밖에 없었던 그 신기한 능력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사람의 심령과 생활 속에 어떤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지를 세 가지로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종교를 통해 자기 소원 성취만 추구하던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1절부터 3절에 “1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유대인 시간으로 “제 구시”는 오늘날로는 오후 3시에 해당됩니다.
  매일 이 시각에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정기적으로 오후 제사를 드렸는데, 이 시간은 일반 백성들이 기도드리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2장 46절에 보면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는데, 어쩌면 베드로와 요한이 그 시간에 성도들이 모이는 정기 기도회를 인도하기 위해 성전에 들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할 때에 그 성전 문 앞에 “나면서 못 걷게 된” 한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나면서”
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는 것은, 그의 신체장애가 어떤 일반적인 치료를 통해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었다는 사실과, 또한 베드로와 요한의 신유 기적이 멀쩡한 사람을 가지고 무슨 쇼를 부린 사기 행각이 결코 아니었음을 명백하게 밝혀 두는 말이기도 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소위 신유집회라는 것이 다 주최측에서 미리 고용한 가짜 병자들과 각본을 짜고 행해지고 있는 사기극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몰래카메라로 찍어서 방영하는 고발프로를 보면서 저 자신 역시 낯 부끄러워진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앉은뱅이의 경우는 그가 출생 때부터 지금까지 불구라는 사실이 성전을 출입하는 모든 백성들에게 다 이미 알려져 있었고 그날도 역시 “사람들이 메고 와서” 그를 성문에 앉혀 두었으니 그런 쇼를 하려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가 날마다 앉아 있던 곳은 “미문(美門)” 즉 ‘아름다운 문’이라는 이름을 가진 장소였습니다.
  이것은 성전 내의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들어가는 문이었는데,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며 미술 시간에 나오는 저 유명한 ‘고린도 양식’을 따라 아름답게 조각된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라는 사람은 이 문을 가리켜 “은으로 입히고 금으로 박은 문들보다도 훨씬 더 가치가 높은 뛰어난 작품”이었다고 평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 앉은뱅이가 바로 그 미문에 앉아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그처럼 보기에 아름다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이 문은 예루살렘의 중심 시가지 방향으로 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통행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잦은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밝히고 있는 그대로 그 문은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서는 제일 좋은 이른 바 명당이었던 것입니다.

  그 앉은뱅이는 세속 역사가까지 칭송할 정도로 성전의 ‘아름다운 문’ 앞에 매일 앉아 있었습니다.
  바로 그 지척에서 날마다 하나님께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고 레위인의 찬송 소리가 들렸으며 성도들의 기도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좋은 장소를 오직 ‘구걸’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기에게 적선해 줄 사람들을 많이 모아 주는 목적에만 유용했습니다.
  성전을 바로 곁에 두고도 그 앉은뱅이는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보다는 그저 동전 몇 푼 더 얻고자 동냥질하는, 가장 낮고 천한 인생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종교생활이란 것을 이런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개인적 소원 성취’ - 이것이야말로 대부분의 종교인이라는 자들이 종교를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이유입니다.
  또 그 소원이란 것 자체도 실상 지극히 유치한 것들뿐입니다.
  오로지 잘 먹고 잘 살게 해 달라고 물 한 그릇 떠놓고 고목나무나 큰 바위 앞에 손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나라와 민족을 막론하고 가장 일반적인 종교의 모습입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이들은 그저 골치 아픈 인생에서 벗어나게 해 줄 약간의 심리적 안정을 얻겠다고 절에 다녀오는가 하면, 혹은 각박한 현대사회에 끌려다니지 않고 무언가 정신적으로 고상하고 차원 높은 삶을 추구하겠다고 성당을 다니고 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으면서도 실제적으로는 각 시대마다 오로지 사람이 필요로 하는 바를 따라서 해방신학이니 민중신학이니 하면서 복음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질시키는 신학자나 목사들 또한 수두룩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적어도 신을 대한다는 사람으로서는 정말이지 너무나 유치한 수준에서 놀고 있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은 그처럼 오로지 개인의 욕구 충족을 위하여 종교생활을 하려는 자들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줍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은 그런 기복적 종교와는 아예 차원이 다른 신앙생활로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것을 영접하고 믿는 자로 하여금 그저 금세에서의 소원 성취 정도가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고 충족시켜 줄 수도 없는, 너무나도 귀하고도 고상한 은혜와 복을 누리게 해 주는 참으로 놀라운 능력이 있음을 꼭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사망의 저주 아래 있던 죄인에게 절실히 필요한 구원을 얻게 해 줍니다.

  4절부터 6절의 말씀에 “4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앉은뱅이가 구걸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함께 그를 “주목하여” 바라보면서 그를 향하여 “우리를 보라”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그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할 때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적선을 거부당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일상의 다반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 두 사람의 옷자락을 붙잡고 간절히 구걸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예 눈도 마주치지도 않고 그저 기계적으로 손만 내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와 요한이 자기네를 바라보라고 하자 그 앉은뱅이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항상 거절당하는 일에만 익숙했던 그의 마음이 이번에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으로 갑자기 흥분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런 앉은뱅이에게 베드로가 던진 첫마디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그 앉은뱅이의 설레던 마음은 한순간 풀썩 무너지고 말았겠지만, 사실은 훨씬 더 좋은 것이 바로 그 뒤에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곧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전혀 뜻밖의 놀라운 선물이었습니다.

  여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로’라는 뜻입니다.
  즉 사도 베드로는 자기 개인의 무슨 특별한 능력으로 이런 일을 행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그를 일으켜 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중에 병자들을 고치는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은 오직 당신의 복음이 참되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초대교회 시절에 이제 막 전파되기 시작한 복음을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확실히 믿게 하기 위해서 그 예수님의 능력이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실제로 신약에서만 해도 사복음서로부터 시작하여 사도행전을 거쳐 서신서로 갈수록, 즉 사도 시대로부터 교부 시대 초기로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신유의 기적이 일어나는 빈도가 현저히 줄어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심지어 디모데전서 5장 23절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는 당부까지 하고 있습니다.
  초기 전도여행 때 숱한 병자들을 고쳐 주었던 사도 바울이었지만, 그의 사역 후반기에 와서는 자기가 그토록 아꼈던 후배 목회자 디모데의 ‘자주 나는 병’을 위해서조차 그런 신유의 능력을 써 주지 않고 그 대신에 ‘일반적인 의료요법’을 권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특별 신유은사의 능력은 바로 본문에 나타난 것처럼 오직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며 동시에 오직 복음전파 초창기에만 발휘되었음이 분명합니다.

  비록 말은 사도 베드로의 입에서 나왔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권능이 앉은뱅이에게 임했을 때, 그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이 단번에 해결되는 역사가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일어나 걷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앉은뱅이 자신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본인은 스스로 요청하거나 기도하지도 못했던 것이지만, 실상 그에게 가장 절실히, 가장 시급하게 필요했던 것은 바로 ‘일어나 걷는 것’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 고질적인 문제를 단숨에 해결해 주었던 것입니다.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주어지기 전에 사람들은 그 앉은뱅이와 똑같이 그저 ‘동전 몇 푼’이 자기 인생에 당장 가장 급한 것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디베랴 언덕에 모였던 수많은 무리처럼 오늘날도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면 ‘공짜 떡’을 매일 배급 받으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찾아든 유대인들의 절대다수가 어찌하든지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되어 독립만 쟁취할 수 있으면 자동적으로 유토피아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처럼, 지금도 기독교를 통해 모든 사람이 평생토록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복지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높은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죄인이고 평생을 매일 죄인으로 살면서도, 사람들은 그 자신의 죄야말로 바로 반드시 고침을 받아야 할, 제일 급히 해결해야 할 최악의 당면 문제인 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앉은뱅이라는 불구는 결코 고쳐질 수 없는 병이라고 자포자기하면서 평생 그 상태를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사람은 죽음이란 것을 피할 도리가 없다고 단정하는 가운데 왜 그렇게 되었는지, 혹 그 죽음을 벗어날 길은 없는지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선포됨으로써 비로소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 가장 고질적이고 중한 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4하)
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이름을 믿지 않는 인생은 바로 자신의 죄 때문에 사망의 저주 아래 처하게 되었음을 비로소 자각하게 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는 말씀을 듣게 될 때, 우리는 오직 예수 이름만이 죄인으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해 주는 놀라운 능력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죄 사함과 구원을 값없이 베풀어 주는, 너무나도 귀중하고 고마운 이름인 것을 확실히 믿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의 본분을 따라 살도록 인도해 줍니다.

  7절 이하 10절에 기록하기를 “7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선포하면서 그 앉은뱅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을 때, 그의 몸에는 실로 평생 처음 느껴보는 변화가 차례대로 일어났습니다.
  우선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앉은 자리에서 벌떡 “뛰어 서게” 되었습니다.
  설 뿐 아니라 한발 한발 앞으로 움직이며 “걷게” 되었습니다.
  걸을 정도가 아니라, 아예 “뛰기”까지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생전 처음으로 체험하게 된 거동의 자유를 그 앉은뱅이가 어디에다 제일 먼저 사용했습니까?
  웬만한 사람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집으로 달려가서 가족들을 만나려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동안 가고 싶어도 제 발로 가지 못했던 예루살렘 부근의 명승지를 가보고 싶어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앉은뱅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일어서서 뛰기까지 할 수 있게 된 그는 즉시 “그들과 함께” 즉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움직이게 된 자신의 두 발로 제일 먼저 성전부터, 지척에 있었지만 평생 들어갈 수 없었던 그 곳부터 들어갔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 앉은뱅이의 입술은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찬송가을 불렀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병 나은 것을 두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렸다는 의미입니다.
  그 찬송하는 목소리가 어떠했겠습니까?
  결코 조용한 소리는 아니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복음성가에서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라는 가사와 곡조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는 정말 큰소리로 외치면서 하나님을 온 힘을 다해 기쁘게 감사찬송을 불렀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감사했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물론 나중에 개인적으로 감사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그 시간 그 자리에서는 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있던 군중들도 오직 그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만 계속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물론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불신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무례한 일이고 배은망덕한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를 일으켜 준 사도들에게나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 된 앉은뱅이에게 있어서는 모든 감사와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는 것이 지극히 당연했던 것입니다.

  평생 하나님 앞에서 구걸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줄은 모르는 입을 가진 사람이란 얼마나 불쌍합니까?
  자기 인생살이에 대한 불만을 토할 때는 목소리가 절로 높아지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소리는 아예 입 밖으로 나오기도 어려운, 정말 답답한 입을 가진 사람이란 사실상 앉은뱅이보다 훨씬 더한 ‘영적 불구자’가 아니겠습니까?
  무슨 전도회나 제직회 석상에서 발언할 때에는 자기가 제일 열심 있는 사람인 것처럼 열변을 토하면서도, 그 인격의 지성소에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송축하는 말은 전혀 나올 줄 모르는 ‘영적 벙어리’들이 이 지상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불신자들이야 그런 입을 가진 것 당연하지만 신자라는 사람들이 그런 ‘불구(不具)의 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을 일인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자기 심령 속에 확실히 영접하게 된 사람이라면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가 주는 기쁨,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이 베풀어 주는 기적을 분명하게 체험한 신자의 입은 절대로 그렇게 닫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날 위하여 십자가의 중한 고통 받으사 / 대신 죽은 주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 /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 죄에서 / 구속함을 받은 우리 어찌 찬양 안 할까’(303장) - 그런 성도의 입에서는 이런 뜨거운 찬양이 터져 나오지 않으려 해야 안 나올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유엔 총회에 가면 제3세계 등 후진국가의 대표일수록 발언할 때 언성을 높이고 심지어 악을 쓰기까지 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경제, 문화, 체능 등 다른 대부분의 분야에서는 이미 세계 최상위의 수준에 도달하고 있지만, 가장 질서 있는 토론에 의해 진행되어야 할 국회에서 여전히 고성과 욕설이 난무하고 얼마든지 정론을 펼칠 수 있는 언론의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길거리에서 목소리 크게 내는 놈이 이기는’ 식으로 여론이 형성되는 것을 보면, 정치만큼은 여전히 조선시대의 사색당파 수준에서 한 걸음도 진보하지 못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불만이 있을 때 울음소리를 내거나 고통을 느낄 때 비명을 지르는 것은 동물도 똑같이 할 줄 아는 수준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적어도 기독신자의 입에서는 그런 불만의 울부짖음이나 악에 받힌 저주가 나와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애당초 하나님께서 사람을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하신 목적이 곧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여호와께 감사하고 찬양할 줄 아는’ 지극히 고상한 신전인격자로 살게 하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구걸밖에 못하던 입술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비로소 찾게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이전에 탄식과 원망으로만 가득 차 있던 인생으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께 전심으로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인생의 본분을 따라 살게 해 주는 실로 위대한 능력이 있음을 반드시 몸소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중세 교회사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유명한 천주교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당시 교황이었던 이노센트 2세를 방문했었습니다.
  그때 이노센트 2세는 로마 카톨릭교회에 들어온 막대한 양의 헌금을 막 세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마침 찾아온 토마스 아퀴나스를 보고 교황은 의기양양하게 말하기를 “이것 좀 보게, 토마스. 이제 교회는 더 이상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말할 수는 없게 되었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정말 그렇군요, 교황님.”이라고 맞장구치면서 한마디 덧붙이기를 “하지만 이제 교회는 ‘일어나 걸으라.’고도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그려.”라고 했습니다.
  은과 금은 엄청나게 많이 소유하게 되었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잃어버린 천주교는 이미 그 어떤 영혼도 살릴 수 없는 무력한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교회는 어떤 ‘재산’을 축적하는 영리단체가 아니라, 사람의 영혼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는 구령단체입니다.
  ‘나사렛’이란 명칭은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던 지명이며 무시당하던 이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나사렛 예수’는 곧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자’의 이름이며,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권위가 있는 이름입니다.
  바로 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야말로 사도들이 “내게 있는 이것”이라고 증거했듯이 신실한 기독신자와 참된 기독교회가 반드시 소유하고 활용해야 할 최대최고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만이 자기 욕심 성취를 위해 종교 생활이라고 하고 있는 ‘영적 걸인’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줄 수 있습니다.
  오직 이 ‘예수님’의 이름만이 모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급한 죄용서와 영혼구원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신전인격자의 삶으로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이 귀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먼저 자신부터 믿어 구원의 확신을 얻고, 또한 이 구세주의 이름을 이웃과 조국과 온 세계에 소리 높여 전파함으로써 ‘날 때부터 장망성에 주저앉아만 있는 죄인’들을 벌떡 일으켜서 ‘하나님의 성전’으로 뛰어 들어오게 하는 큰 전도의 능력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