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1-22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사도행전 2장 22-36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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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경향의 강단(5) (2017년 1월 22일 / 주일 대예배)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사도행전 2장 22-36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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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2장 22-36절/ 석기현 담임목사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려져 있는 ‘천지창조’는 직접 방문해 보지 못한 사람조차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 한 번쯤은 다 보았을 만큼 세계적인 명화입니다.
  이것은 미켈란젤로가 4년에 걸쳐 1511년에 완성한 대작으로서 창세기에 나오는 몇 가지의 일화들과 그 외 구약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사건과 인물들을 그려 놓은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소위 ‘프레스코화’라는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변색되거나 아예 색이 떨어지는 곳이 생기기 시작했고, 게다가 촛불에서 나오는 그을음 등이 먼지와 함께 표면에 달라붙으면서 원래의 색깔보다 점점 더 어두워진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이미 1565년부터 덧칠 작업이나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그러다보니 오히려 원작과는 조금씩 다른 그림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 즈음에 과학적 분석을 통해 수리된 부분과 원작을 보다 정확하게 구분해 낼 수 있게 되면서 현대적 첨단기술을 동원한 복원이 시작되었고, 3기에 걸친 대대적인 작업이 1994년 4월에 드디어 완성되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사람들은 ‘천지창조’를 미켈란젤로가 원래 그렸던 색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침침하고 고색창연한 색으로 일관되었던 복원 전의 그림과 비교해 볼 때 놀라울 만큼 훨씬 더 밝을 뿐 아니라 아주 화려한 색상의 작품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명화가 후대 사람들의 수준 낮은 ‘덧칠’이나 무분별한 ‘훼손’ 때문에 원래의 아름다움이 가리어졌던 것처럼, 기독교의 복음 역시 교회사를 통해 인본주의 사상이나 이단 사설에 의해 그 본질이 퇴색되어 왔습니다.
  그렇게 변질된 복음은 그것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인에게 최고의 ‘기쁜 소식’으로 주어졌던 원래의 복음이 보유하고 있는 능력과 감동적인 은혜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게 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 ‘원래 색깔의 복음’, ‘오리지널 복음’은 과연 어떻게 복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찾을 수 있습니다.

  앞서 사도행전 2장 서두에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예수님께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성령을 받은 직후에 사도 베드로가 했던 첫 설교이니만큼 이것이야말로 그 어떤 군더더기나 먼지 따위가 붙어 있지 않는, ‘복음의 순수한 결정체’임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예루살렘교회를 그처럼 폭발적으로 부흥시켰고 오늘날까지도 택자의 심령을 감화 감동시켜서 구원의 확신이 있는 중생인이 되게 하며 교회운동에 동역하는 사명인으로 만들어 주는 ‘복음의 원판’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속사의 예정을 따라 ‘화육강세’하신 것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본문 22절과 23절에 “22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23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라고 기록했습니다.

  바로 앞의 14절부터 21절까지에서 우선 자기네가 성령충만을 받게 된 배경을 구약 요엘서를 인용하여 설명해 준 사도 베드로는 이제 여기서부터 설교의 본론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첫째 대지는 “나사렛 예수”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세상에 찾아오신 구세주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나사렛’은 바로 예수님께서 자라나신 고향이었으므로 이 ‘나사렛 예수’라는 명칭은 예수님의 출생 때부터 갈릴리에서 복음 전파를 시작하시기 전까지의 ‘사생애’를 나타냅니다.
  그러다가 30세 즈음에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가득 채워진 ‘공생애’를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두고 베드로는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행하신 기적들은 “너희 가운데서 베푸신” 것, 즉 지금 그의 설교를 듣고 있는 유대인들 자기네도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것인 까닭에, 여기에 대해서 베드로는 달리 무슨 증거를 제시할 필요조차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당시의 역사적 기록들을 보면, 예수님의 반대파들조차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으며, 단지 그런 일들을 무슨 ‘사술’을 써서 행한 것이라고 언급하는 내용들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누가복음 11장 15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 따위의 힘을 입어 행한 것이라고 비난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베드로는 그런 예수님의 기적적인 생애 자체가 곧 “하나님께서...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신”,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당신이 보내신 구세주로 자증해 주신’ 것이었다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애뿐 아니라 그의 죽으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려 돌아가신 것 또한 예수님이 ‘재수가 없어서’도 아니며 예수님이 ‘실패해서’가 결코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라고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현실적으로는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의 손을 빌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것까지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속사 성취를 위해 원래 정해 놓으신 계획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섭리에 따른 것이었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Jesus Christ Super Star’(예수 그리스도 슈퍼스타)라는 유명한 뮤지컬이 있습니다.
  제목만 들으면 예수님을 최고로 높이는 내용의 작품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한 인간으로만 묘사하면서, 그저 당시 정치적 상황과 대중의 기대에 의해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슈퍼스타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는 식으로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세상의 연예인들을 ‘스타’라고 부르듯이 예수님도 결코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오로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슈퍼스타’일 뿐이라는, 실로 신성모독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뮤지컬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그저 사람 가운데 좀 뛰어난 현인이나 위인의 수준이 아닙니다.
  ‘4대 성인’이니 하면서 석가와 공자와 마호메트와 나란히 추앙을 받을 만한 수준에 머무르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을 슈바이처 같은 사람이 주장했듯이 무슨 ‘신들린 사람’이나 ‘광신도’ 따위로 취급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될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성자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오로지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죄인 구원을 위하여 실로 고마운 뜻을 작정해 주시고 당신의 정확한 계획을 따라 벌어지게 하신 유일무이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기쁜 소식’이 된 복음은 이처럼 그 출발부터가 오로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요 3:16), 실로 ‘인자하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 ‘전지전능하신 주권’으로 이루어주신 최대최고의 특별한 기적인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그 비범함과 위대함에 있어서 이 예수님과 필적할만한 사람이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는 무슨 사족을 달 필요조차 없지 않습니까?
  ‘나사렛 예수님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해 화육강세시켜 주신 구세주이시다.’라는 이 복음의 출발을 분명히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께서 십자가 대속을 성취하신 후에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이 복음의 정점입니다.

  24절부터 28절의 말씀에 “24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5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27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 부활 역시 오직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신” 역사였는데, 그렇게 하신 이유를 두고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고 했습니다.
  즉 죄인을 사망으로부터 구원해 주러 오신 구세주께서 본인부터가 죽음에 매여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부활 사건이야말로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였다는 사실을 가장 확실히 드러내 주는 ‘증거 제1호’에 해당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모든 유대인들이 목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까 예수님의 공생애는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라고 간단히 줄일 수 있었지만, 이 부활에 대해서는 보다 자세한 입증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선 시편 16편 8절부터 11절까지를 자기 설교의 본문으로 인용하면서 이 말씀이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즉 다윗이 ‘오실 메시아’를 가리켜 예언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바로 그 메시아는 다윗의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실” 분이신데 다윗의 육체로 하여금 그와 같은 “희망에 거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주의 거룩한 자” 즉 메시아로 하여금 “썩음을 당하지 않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실 것이라고 이미 구약에서부터 정확하게 예언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상세한 설명을 덧붙입니다.
  29절부터 32절에 기록하기를 “29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가 인용한 시편 중에서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는 말씀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것은 분명히 어떤 사람이 죽은 후에 다시 육체적으로 부활할 것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이 설교를 할 당시 “다윗”은 분명히 이미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즉 바로 예루살렘 성 안에)” 있었기 때문에 이 예언은 다윗 자신을 가리킨 것이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장차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실 것을 그때부터 이미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 “미리 본 고로” 이 시편을 통해 예언적으로 “말했던” “선지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된 예언대로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 부활의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이제 베드로가 확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구약에서 이미 예언된 사실임을 밝힌 후에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라고 천명했습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다른 열한 명의 사도들, 다락방의 일백이십 문도들, 그리고 그 외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던 오백여 명의 성도들 모두를 그 부활 사건에 대한 증인으로 언제든지 출두시킬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선언했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유대인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실로 설득력 있는 증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는 한두 명, 일이십 명 정도가 아니라 수백 명의 증인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어느 법정에서, 아무리 의심 많은 배심원들 앞이라 해도 수백 명이 똑같이 증언하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면, 그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서 예언된 ‘오실 메시아’임에는 조금이라도 의심의 여지가 남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칭 ‘구세주’라는 자들 중에 그 어느 누구도 스스로의 육체 부활을 통하여 자신의 진짜 구세주 됨을 증거해 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석가고 공자고 마호메트고 다 사망의 종노릇하던 인생을 살다가 사망에 사로잡혀서 그 인생을 끝낸 자들이었습니다.
  그처럼 자기 자신부터가 ‘사망에 매여’ 있는 무력한 사람을 성인이라고 받들고 교주라고 믿는다고 해서 도대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이 무섭고도 강력한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하고도 참된 구세주이시라는 이 복음의 최고 정점을 그대로 믿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께서 끝까지 믿지 않는 불신자를 심판하시려고 ‘재림’하시는 것이 복음의 완성입니다.

  33절 이하 35절에 “33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34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제 부활하신 이후의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하면서 그 분은 지금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높이신” 자리에 좌정하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영광의 보좌에 계신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다”고 증거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택자로 하여금 당신을 믿게 하시고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전도하게 하시는 구령 사역을 계속 지휘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것 역시 다윗의 시편 110편 1절에 예언된 것이라고 베드로는 정확하게 밝혀내고 있습니다.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께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고 하셨는데, 물론 이것도 다윗에게 실현된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죽은 후에 “하늘에 올라가지” 즉 승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 역시 오직 ‘오실 메시아’께 적용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예언은 예수님께 남아 있는 마지막 한 가지 사역을 밝히고 있는데, 곧 예수님께서 지금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은 그 “원수로” 당신의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기다리고 계시는 때라는 사실입니다.
  이 땅에 초림하셔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죄인 대속을 성취해 놓으신 예수님의 사역은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다 끝난 것은 아직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자 하나님의 또 한 가지 중대한 사역, 곧 최후의 대심판을 위한 재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은 그 얼마나 단호하고 두렵게 예수님의 이 마지막 사역을 예언하고 있습니까?
  그 날을 가리켜 ‘원수로 발등상이 되게 하실 날’이라고 단언했습니다.
  ‘발등상’이란 보좌 밑에 있는 발 받침대입니다.
  즉 이 말씀은 달리 표현하자면 ‘원수를 발로 뭉개어 버릴 날’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의 재림은 실로 ‘크고 두려운 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날은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해 당신의 몸을 십자가의 대속제물로 주시려고 오셨던 초림 때와는 그 분위기가 백팔십도로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사람들끼리 말할 때에도 ‘좋게 해 줄 때가 좋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마음 좋은 사람이 참고 참다가 끝내 화를 터뜨리게 되면, 그것은 오히려 보통 사람이 화내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좋게 해 주실 때 잘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아직 ‘은혜 받을 만한 때’ 아직 ‘진노를 참고 기다려 주시는 이 때’에 그 예수님을 믿고 그 사랑의 구원을 확보해 두어야지, 그 때를 놓치면 그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세상의 그 어떤 엄한 재판장보다도 가장 무서운 심판주가 되실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애와 자비와 사랑이 한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영접한 신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끝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에게는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자들에게 당신의 ‘원수’라는 딱지를 붙이시고 그들을 무서운 영벌의 심판으로 짓밟아 버리실 공포의 날을 준비하면서 보좌 우편에서 ‘벼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심판주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 그저 ‘구세주 예수님’만 믿겠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무슨 ‘반신불수의 구세주’로 취급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한없이 사랑하시고 몸까지 대신 제물로 바치셨다는 사실은 정말 ‘은혜로운 복음’이지만, 그 똑같은 그리스도께서 장차 악인들을 원수로 미워하시고 영원한 지옥불로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실로 복음의 원본에 손상을 입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두 쪽을 내어버리는 행위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첫 설교에 명백히 증거된 원래의 복음은 그런 ‘반쪽짜리’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죄인 대속을 위해 죽으시고 죄인에게 영생까지 주시기 위하여 부활 승천하셨던 우리 예수님께서 이제 그 초림을 영접하지 아니하는 모든 악인들을 당신의 원수로 심판하시기 위하여 반드시 속히 재림하실 것이라는 이 ‘오리지널 복음’의 전부를 끝까지 다 믿고 준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죄인 구원을 위해 보내 주신 구세주이시다. 예수님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장차 악인을 심판하러 반드시 다시 오실 재림주이시다.” - 바로 이것이 ‘복음의 원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베드로는 36절에서 “36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너희들이 믿지 않고 배척했던 이 예수’는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주님이시요 그리스도’이시라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이 복음이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심령을 감동시킴으로써 예루살렘교회는 바로 그날 하루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게 되었으며, 그 외에도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 중에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간 후 여러 이방지역에 개척교회 멤버들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다른 아무도 이런 예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역사상 그 어떤 존경받는 현자나 성인이나 위인도 결코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는 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한 분만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우리의 주님이시요 우리의 구세주이실 따름입니다.

  바로 성경이 이 ‘복음의 원본’을 그대로 오늘날의 우리에게까지 정확하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완전영감된 무오한 말씀인 까닭에, 그 복음의 내용을 조금의 변색도 없이 오직 원래 있었던 그대로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예수 믿으면 부자 되게 해 준다, 병 고쳐 준다, 장수하고 만사형통하게 해 준다.’는 따위의 먼지가 묻어 있는 복음이란 이미 ‘원(原)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했다느니, 다시 재림한다는 따위의 말은 옛날 과학을 모르던 시대의 사람들이나 믿을 수 있는 신화에 불과하니 오늘날 현대인들도 존경하고 본받을 수 있는 인물로 재해석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소위 ‘역사적 예수’를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은 복음의 본질을 완전히 훼손시키는 이단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만으로가 아니라 ‘사람의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천주교의 ‘이행득구’ 교리나, 기독교의 목적은 ‘죄인을 구원하여 천당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변화시키는 것’에 있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결코 복음의 원판이 아니라 오로지 사탄이 만들어낸 불법 해적판일 뿐인 것입니다.

  음식점들이 모여 있는 거리에 가면 저마다 ‘원조’라는 간판을 걸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진짜 원조는 하나밖에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온갖 ‘변형 복음’들을 전하고 있는 교단과 이단들이 저마다 자기네가 원조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진짜 ‘원조 복음’은 오직 성경이 선포하는 단 한 가지일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화육강세’시켜 주신 유일무이한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사망에서 건져 주시기 위해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장차 악인을 심판하시기 위해 반드시 속히 ‘재림’하실 그리스도이십니다.
  바로 이것만이 선지자들이 예언했고 사도들이 증거했던 ‘순수한 복음의 오리지널’인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으로 덧칠되고 사탄의 꾀는 말로 변색된 ‘가짜 복음’에 결코 미혹당하지 말고, 오직 성경 말씀이 증거하는 이 ‘원래의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고 또한 땅끝까지 소리 높여 전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