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1-15 “주 예수를 믿는 자” 사도행전 16장 11-40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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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경향의 강단(4) (2017년 1월 15일 / 주일 대예배)
“주 예수를 믿는 자” 사도행전 16장 11-40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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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믿는 자"

사도행전 16장 11-40절/ 석기현 담임목사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언젠가 고속도로를 운전하면서 가다가 어떤 동양인 여자 한 사람이 갓길에 차를 세워 놓고 난처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 차를 세우고 도와드리려고 다가가보니 마침 한인교포였는데 그 자동차는 냉각수가 터져 운행불능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 분은 비즈니스 미팅을 하러 가던 길이었는데, 이미 약속시간은 많이 늦었고 당시는 아직 휴대폰이 그리 일반화되지 않았던 때라 지나가는 경찰이 도와주기만 기다리면서 발을 동동 굴리던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차는 나중에 견인해 가도록 하고 일단 제 차로 그 약속장소에 모셔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차안에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그 여자 분이 느닷없이 제게 “혹시 교회 전도사님이세요?”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무 교회 전도사’라고 대답은 해 주면서도 속으로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 신상에 대해 말한 것은 전혀 없는데 도대체 무엇을 보고 그런 인상을 받았는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물어 보기도 뭣해서 그냥 그렇게 넘겨 버렸습니다.

  실제로 저는 그처럼 상대방으로부터 ‘전도사가 아니냐?’ 혹은 ‘목사가 아니냐?’라는 질문을 그때 말고도 두어 번 들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만, 스스로 제 얼굴을 살펴보면 그리 ‘천성적인 목사’의 인상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아마 저도 모르게 남들 앞에서 겉으로 점잖은 척, 경건한 척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지 않나 하는 추리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어야만 할 말은 ‘혹시 목사님 아니세요?’가 아니라 ‘혹시 기독교인이 아니세요?’라는 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저의 언행을 통해 은연 중 드러나야 할 것은 ‘목사로서의 체면을 지키려 하는 외식’이 아니라 ‘참된 크리스천이 절로 풍기게 되는 은근한 향기’가 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신앙’이란 현실적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심령’의 영역에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신앙이 그 속에 있으면 그것은 반드시 ‘눈에 보이는 행동’을 통해 밖으로 나타나기 마련인데, 오늘 본문의 내용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10절 이전에 나오듯이 이제 사도 바울의 복음전파 진행 방향이 서쪽 즉 마게도냐 쪽으로 잡혔는데, 그 첫 테이프를 끊게 된 빌립보에서 성령께서는 두 사람의 심령 속에 ‘주 예수를 믿는’ 신앙이 생기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 속에 믿음이 있는 표’도 따라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본문의 사건을 통해 참된 기독신자는 과연 어떤 ‘믿음의 증거’를 밖으로 나타나게 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진실로 주 예수님을 믿는 신자는 ‘말씀의 은혜’를 ‘교회 봉사’로써 발휘하게 됩니다.

  본문 11절부터 15절에 “11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빌립보”를 가리켜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라고 한 것은 바울이 마게도냐로 전도여행을 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도착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시저의 암살자로 유명한 브루터스와 카시우스가 주전 42년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곳이 바로 이 곳이었으며, 그 후 이곳은 로마 황제로부터 임명된 로마 장군이 자치권을 행사하며 다스리는 곳이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로마의 식민지”라고 언급하고 있는 이유도 빌립보가 그처럼 로마의 영향력이 팽배한 도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빌립보에서 사도 바울은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에... 기도할 곳”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그곳에서 며칠을 지내는 동안에도 ‘유대인 회당’을 찾지 못했음을 암시하는데, 그것은 그만큼 로마적인 사회 분위기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곧 유대인들의 숫자가 적었다는 뜻도 되며, 유대인을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벌이던 사도 바울에게는 그만큼 불리한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그처럼 마게도냐 복음화를 향한 대장정의 첫 걸음에서부터 큰 난관에 봉착한 것처럼 보였던 와중에도 하나님께서는 전도자가 뚫고 나갈 수 있는 길을 이미 예비해 두고 계셨습니다.
  기도처를 찾던 바울은 강가에 모여 앉은 일단의 “여자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회당을 찾지 못했던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라 생각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중의 한 명인 이방 여인 “루디아”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즉 복음을 영접하도록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그 루디아는 “두아디라”에서 “자색 옷감 장사”를 하던 여자였는데, 그 “시”에는 유대인의 공동체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그곳의 유대인들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교 개종자’가 되었다가, 이제 바울의 전도를 받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기독교인’이 된 것 같습니다.
  두아디라시는 자줏빛 물감을 들인 옷감이나 상품들을 파는 상업으로 유명했는데 그녀는 바로 그 시의 특산물을 이곳 빌립보에 와서 파는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즉 이 루디아라는 여자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커리어 우먼’(career woman) 즉 ‘직업을 가진 독립적 여성’이었는데, 이것은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그녀가 과부였든지 아니면 아예 남편이 없는 독신녀였을 가망성을 시사해 줍니다.
  본문에서 그녀의 남편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것을 뒷받침해 주며, 만약 그렇다면 15절에서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라는 말은 그녀의 가족이 아니라 그녀 밑에서 일하고 있던 직원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여튼 그녀는 복음을 영접하자마자 세례를 받고 확실한 기독교신자가 되었는데, 바로 그 직후에 했던 일이 곧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 영접하여 유숙시키고 대접한 일이었습니다.
  루디아의 초대를 받은 바울 일행은 고맙기는 했겠지만 아마 남편 없는 여인의 집에 들어가기가 거북해서인지 일단 사양을 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강권하여”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 “머물게” 했다고 본문에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강권하면서 루디아가 한 말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어떤 거북한 조건이나 사양할만한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자신이 ‘주 예수를 믿는 자’가 되었다는 그것 하나만 생각한다면 사도 바울 일행이 자신의 초청을 받아들여 주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녀가 전도자들을 대접하는 것이 바로 신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당연한 일이라고 확신했음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루디아는 신앙생활의 첫 순간부터 자기에게 주어진 ‘봉사의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초청이 본격적인 빌립보 전도 활동에 결정적인 징검다리가 되었습니다.
  아까 언급했던 것처럼 빌립보성은 유대인 거주자들이 그리 많지 않았던지라 사도 바울이 전도의 거점이나 본부를 마련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루디아의 환대로 말미암아 바울은 바로 그녀의 집을 중심으로 빌립보 전도를 확대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즉 바울은 루디아의 집에 머물면서 나중에 16절 이하에 나타나는 대로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 준 일과 감옥에 갇혔다가 오히려 ‘간수’를 전도하는 등의 사역을 펼쳐가게 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마지막 40절에 보면 “40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는 놀라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빌립보를 떠날 때 즈음에는 이 루디아의 집이 벌써부터 빌립보교회의 예배 장소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해 줍니다.
  그 후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떠난 후에도 실로 ‘마게도냐의 첫 교회’라 불릴 만큼 착실하게 계속 성장했으며, 또한 바울의 전도 사역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후원한 대표적인 교회였습니다.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빌 4:15)
고 바울이 극구 칭찬하며 감사한 교회가 바로 이 빌립보교회였던 것입니다.
  한 이방 여인이 ‘마음을 열어 말씀을 받고’ ‘주 예수를 믿는 자’가 되자 즉시 ‘전도자와 교회를 섬기는’ 행동이 그 뒤에 따라오게 되었고, 그 작은 봉사가 결국 이처럼 큰 교회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게 된 사람은 이처럼 그 받은 말씀의 은혜를 따라서 절로 전도자를 후원하고 교회를 섬기는 봉사를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는 신자는 필연적으로 그 신앙고백의 ‘반석’ 위에서 함께 ‘교회의 지체’가 되도록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신체의 일부는 당연히 그것이 속한 몸 전체에 유익하도록 반응하지 않습니까?
  손이 무슨 작업을 하는 것은 몸 전체가 필요한 일이며, 발이 어디로 움직이는 것도 몸 전체가 가고 싶은 곳으로 옮겨 주는 일입니다.
  심장이 박동하는 것은 몸 전체에 필수적인 피를 돌리기 위함이며, 위가 소화를 하는 것도 몸 전체에 없어서는 안 될 영양분을 공급해 주기 위함입니다.
  즉 육신의 각 지체는 그 몸 전체를 위해서 해야 할 기능과 역할이 있으며 그것을 본능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있는 교회에서 ‘지체’가 된 신자 역시 꼭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아무 기능이 없는 지체란 있을 수 없으며 만약 원래 주어진 기능대로 작동하지 않는 지체라면 이미 죽어 버린 지체임이 틀림없습니다.
  즉 그 속에 ‘예수 신앙’이 분명히 살아 있는 신자라면 교회를 통해 각자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따라 ‘선한 일을 위한 봉사’라는 작동을 반드시, 자동적으로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은혜’는 받고 있는 것 같지만 교회에 나와서 구체적으로 ‘섬기는 일’은 없다면, 그런 교인은 결코 ‘말씀의 은혜’를 제대로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마음이 열려’서 말씀을 받으면 필연적으로 그 몸도 ‘그 말을 따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진정 ‘주 예수를 믿는 자’라고 생각한다면 그 주님께서 명하신 말씀대로 작은 일 하나라도 ‘교회를 섬기는 봉사’의 삶부터 꼭 발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진실로 주 예수님을 믿는 신자는 ‘구원의 확신’을 ‘전도와 선교’로써 나타내게 됩니다.

  25절 이하 34절에 기록하기를 “25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7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9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30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31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32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3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고 했습니다.

  16절 이하 24절에 보면, 루디아의 집을 거점으로 이제 본격적인 전도 활동에 나서게 된 사도 바울은 예기치 못한 사태를 당하게 됩니다.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가 바울 일행을 따라다니며 며칠 동안 계속 귀찮게 하고 괴롭혔던 것입니다.
  비록 귀신들려 하는 소리이기는 했지만 그녀가 바울 일행을 두고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라고 한 것은 바른말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바울이 전하던 복음의 핵심은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이었는데, 그 여종이 며칠을 두고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그렇게 소리를 질렀으니 그 ‘구원의 길’이라는 메시지는 온 빌립보 사람들의 뇌리에 절로 다 새겨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여튼 우여곡절 끝에 바울 일행은 그 점쟁이 여종을 고쳐 준 것이 죄목이 되어 주인들에 의하여 고발을 당했고, 결국에는 ‘소란죄’와 ‘미풍양속을 해쳤다는 죄목’까지 추가되어서 태형을 받은 후에 투옥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얽히고설키는 사건들 또한 성령께서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자 하신 예비과정이었습니다.

  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첫날 밤중에 한 일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한 것이었습니다.
  박해와 고난조차 그들에게는 감사의 제목이 되었던 것인데, 바로 그 소리를 “죄수들이 듣더라”고 했습니다.
  즉 감옥조차 전도자에게는 오히려 전도의 호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충성스러운 바울과 실라를 위해 “큰 지진”을 동원하여 “옥문들이 열리게” 하시고 그 “매인 것” “차꼬”(24절)까지 절로 풀리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앞서 13장에서 베드로가 투옥되었을 때에는 천사가 베드로만 조용히 깨우고 저절로 사슬이 벗겨지고 옥문도 절로 열리게 했으며 간수들도 계속 자게 했습니다.
  그야말로 베드로 혼자 바람처럼 조용히 빠져 나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큰 지진이 나고 옥터가 흔들려서 당연히 간수도 깨게 만드셨습니다.
  즉 두 사람을 탈옥시키기 위한 기적이 아니라,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 속에 예수 신앙을 불어 넣어 주기 위한 하나님의 절묘한 섭리였던 것입니다.
  또한 바울과 실라 역시 그것을 도망칠 기회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전도의 기회로 적절히 활용한 것도 얼마나 지혜로운 자세였습니까?

  어쨌든 옥문이 다 열린 것을 본 간수는 당연히 죄수들이 다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 간수는 자기가 지키던 죄수가 탈출하게 되면 본인이 그 죄수 대신에 사형을 당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바울이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백이면 백 다 도망쳤어야 했을 죄수가 그런 상황에서 태연히 감옥 속에 남아 있었으니 정말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그 놀라움이 점차 안도감으로 바뀌게 되면서 결국 간수는 바울 일행에 대한 경외심이 절로 우러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서워 떨며” 그 두 사람 “앞에 엎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간수의 입에서는 놀라운 첫마디가 터져 나왔습니다.
  바로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왜 도망치지 않았느냐?’라는 따위의 질문도 아니었고 ‘당신네들이 전한다는 종교는 어떤 것이냐?’라는 식의 질문도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당신네가 전하는 그 구원이라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그의 심령에서 솟아난 첫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 간수의 마음에 이미 ‘구원’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앞서 며칠 동안 바울이 빌립보성에서 전도하고 있을 때부터, 게다가 그 귀신들린 여종이 따라다니면서 외치는 소리까지 합세됨으로써 ‘이들이 무언가 사람의 구원과 관련이 있는 어떤 종교를 전파하고 있나 보구나.’ 하는 생각이 이미 그 간수의 뇌리 속에 박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명료하게 주어졌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는 이 복음, 사람이 반드시 깨닫고 영접해야 할 이 ‘신앙과 구원’이라는 절대적인 인과관계의 진리가 그 간수의 심령을 파고들게 되었습니다.
  그 간수의 믿음은 이처럼 처음부터 ‘구원의 확신’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것이었으며, 바로 그것이 그처럼 ‘먼저 믿게 된 가장’으로 하여금 ‘너’뿐 아니라 ‘네 집’ 즉 “그와 온 집안”까지 함께 예수님을 믿게 하고 함께 “세례”를 받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까 루디아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분명히 얻게 된 사람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자기 가족부터 시작하여 가까운 친구나 직장 동료들까지 당장 ‘전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신자가 되는 목적이 그저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약간의 ‘심리적 안정’을 얻는 것이나 힘들고 괴로운 인생 중에 무슨 ‘상담이나 위로’를 받는 정도에 머무는 사람에게는 자기 가족을 전도하는 일이란 그리 급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 평생 그들을 전도하지 않아도 아무 양심의 가책 따위를 전혀 느끼지 않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그 ‘평안’이나 ‘조언’이 조금 필요했을지라도 그 배우나자 자녀들은 그런 것 없어도 나름 행복하게 살고 있으면 굳이 같이 기독신자가 되자고 전도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정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 신자라면 절대로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가족이나 지인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영벌저주에 빠지게 되는 것을 그냥 뻔히 내버려 둘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도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들 중 하나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대로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마음이 조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아무리 본인은 교회에 출석하고 세례까지 받았다 하더라도, 아직 믿지 않는 자기 남편이나 아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자기 아들이나 딸조차 전도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은, 구차한 변명이 필요 없이, 그저 ‘교인’일 뿐이지 결코 ‘신자’는 아닌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5-16)는 지상명령을 내리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믿는 사람’만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본인부터 확신하고 있다면, 당연히 ‘내 집 근처’부터 시작해서 ‘온 천하’에 이르기까지 이 ‘구원의 복음’을 가지고 전도하며 선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음’으로써 자신의 심령 속에 ‘구원의 확신’을 분명히 소유하게 된 신자답게 아직도 이 구원을 얻지 못한 불쌍한 생명들을 위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부지런히 힘써 전도하며 선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빌립보교회는 이렇게 해서 탄생되었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주 예수를 믿는 첫 순간부터 교회를 섬기는 일에 헌신한 여자 한 명, 그 믿음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얻자마자 먼저 자기 가족부터 전도한 간수 한 명이 바로 그 훌륭하고 모범적인 빌립보교회의 초창기 멤버가 되었던 것입니다.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이라는 참된 신앙고백이 ‘그에 합당한 행실’로써 즉시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한때 즐겨 보았던 미국드라마 중에 ‘라이 투 미’(Lie To Me), ‘나한테는 거짓말을 못 해’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소위 ‘프로파일러’(profiler)를 소재로 한 것인데, 우리나라 시청자들에게 더 잘 알려진 ‘크리미날 마인즈’(Criminal Minds) 역시 FBI 즉 미연방수사국의 행동분석팀에 소속된 프로파일러들의 이야기를 다룬 미드입니다.
  그 프로파일러란 사람의 미세한 표정이나 반응, 사소한 제스처나 행동을 면밀히 관찰해서 그 내면을 파악하는 전문가를 일컫는 말인데, 특히 현대에 와서 범죄 수사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사람이 진심으로 웃는 경우에만 눈가에 주름이 생긴다거나,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려 긴장하게 되면 갑자기 다리를 떨기 시작하는 것 등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입에서 나오는 말’로 상대방을 속일 수는 있어도 무의식적인 ‘행위 언어’ 또는 ‘신체 언어’(body language)로는 결코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해서 진실 여부를 가리는 직업이 프로파일러인 것입니다.

  그 ‘행위 언어’를 기독교식으로 바꾼다면 바로 ‘신행일치’에 해당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고 하신 말씀 역시 똑같은 의미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려 해도 그 ‘열매’ 즉 그 사람의 ‘행위’를 통해서 절로 알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속에 있는 믿음’은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과 직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절대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철칙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런 ‘믿음의 열매’, ‘신행일치의 삶’을 나타내고 계십니까?
  주일마다 이 경향의 강단에서 선포되고 있는 ‘말씀’에 진정 ‘은혜’를 받고 있다면 당연히 이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살아 있는 지체’답게 봉사와 충성의 삶이 따라와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결코 세상에서의 행복이 아니라 ‘천당영생의 구원’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고백하고 있다면, 당장 내 가족부터 시작해서 가까운 친구와 이웃을 ‘전도’하고 또한 ‘보내는 자’로서 ‘땅 끝까지 이르는 선교’에 생애 최고와 전부를 기쁘게 바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를 먼저 부르셔서 복음을 영접하고 구원을 얻게 해 주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면서, 바로 그 참된 신앙에 따른 ‘교회 봉사’와 ‘전도와 선교’의 열매를 반드시 나타냄으로써 진실로 ‘주 예수를 믿는 자’의 증거를 교회와 온 세상 앞에 분명히 드러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