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1-08 “성막 곧 증거막” 출애굽기 37장 1절 – 38장 8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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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01-08
2017′경향의 강단(3) (2017년 1월 8일 / 주일 대예배)
“성막 곧 증거막” 출애굽기 37장 1절 – 38장 8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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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 곧 증거막"

출애굽기 37장 1절 – 38장 8절/ 석기현 담임목사
우리 부부가 미국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할 무렵 갈등이 하나 생겼는데, 그것은 인테리어의 취향이 서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제 아내는 대체로 고풍스럽고 아기자기한 것들을 좋아하는 반면에 저는 현대적이면서도 단순한 것들을 좋아하는지라, 무슨 가재도구나 가구 하나를 들여 놓으려 할 때마다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을 함께 만족시켜 주는 것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취향만 다를 뿐 아니라 제 딴에는 자기가 보는 눈이 더 수준 높다고 피차 자부하고 있었으니, 이 집안꾸미기만큼은 도저히 합의점을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성격 차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는 없는지라(?), 우리 부부는 고심 끝에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바로 각자의 영역만 자기 마음대로 꾸미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거실과 서재를, 그리고 제 아내는 부엌과 침실을 맡아서 인테리어를 했는데, 그 결과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은 각 방마다 거의 극과 극으로 바뀌는 분위기를 보면서 속으로 꽤 의아해 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부부의 인테리어 취향 차이는 단지 ‘미적 감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용적 기능’에서 더 크게 나타납니다.
  즉 제 아내는 그저 예쁘게만 보이면 그것과 비슷한 것이 이미 집에 있든지 없든지 혹은 그게 정말 필요한 것인지 아닌지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 반면에, 저는 ‘인테리어란 단순히 장식만이 아니라 기능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철학에 따라서 꼭 필요한 것만을 가격은 좀 비싸더라도 반드시 좋은 제품으로 구입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생활에서 다소 사소해 보이는 문제를 두고 사람들이 그처럼 신경을 쓰는 이유는, 그 가구나 장식품들이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바로 집주인의 성격이나 내면을 그대로 반영해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앞의 출애굽기 36장 8절부터 38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디어 하나님께서 명하신 성막을 만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일종의 ‘운반식 텐트’와도 같은 외막 자체에는 그리 특별한 의미가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 성막 안에 들어갈 인테리어들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었습니다.
  그 ‘성막 기구’ 하나 하나가 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오묘한 ‘영적 기능’ 즉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성막 중심의 신앙생활을 통해 구체적으로 어떤 은혜를 누릴 수 있는지를 반영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그 성막은 신약시대의 교회를 예표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오늘날의 교회를 통해 꼭 누리도록 정해 놓으신 은혜들이 과연 무엇인지 이 시간 저는 그 성막 기구들이 각각 상징하는 의미를 통해 여러분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도는 교회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은총’부터 반드시 체험해야 합니다.

  본문 1절부터 6절에 “1브살렐이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었으니 길이가 두 규빗 반, 너비가 한 규빗 반, 높이가 한 규빗 반이며 2순금으로 안팎을 싸고 위쪽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금 테를 만들었으며 3금 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네 발에 달았으니 곧 이쪽에 두 고리요 저쪽에 두 고리이며 4조각목으로 채를 만들어 금으로 싸고 5그 채를 궤 양쪽 고리에 꿰어 궤를 메게 하였으며 6순금으로 속죄소를 만들었으니 길이가 두 규빗 반, 너비가 한 규빗 반이며”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궤”라고 번역된 말은 히브리어 원문에서 ‘율법’이라는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궤’를 때로는 ‘법궤’, ‘증거궤’, ‘언약궤’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법궤 속에는 ‘십계명의 두 돌판’, ‘만나를 담은 항아리’, 그리고 나중에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추가로 보관되었습니다.
  하지만 법궤에서 정말 중요한 요소는 바로 6절에 언급된 “속죄소”에 있습니다.
  이것은 직사각형 모양의 판 양쪽 끝에 두 개의 그룹들이 그 날개를 중앙 방향으로 드리우고 있는 것으로서 법궤를 덮는 뚜껑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속죄소’라 부른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의 속죄 은총’을 상징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이것을 다른 말로 ‘시은소’ 즉 ‘은혜가 베풀어지는 곳’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 속죄소가 바로 법궤 위에 덮여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법궤 속에는 십계명 돌판 즉 즉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율법이 있었습니다.
  만약 그 율법만 법궤 속에 있었더라면 사람들은 그 앞에서 아무 희망도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완벽하고도 공의로운 율법 앞에서는 예외 없이 다 죄인으로 드러날 도리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법궤 바로 위에다가 속죄소 즉 ‘대제사장이 속죄제물의 피를 뿌리는 곳’을 두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법궤와 속죄소가 의미하는 바는 곧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난 사람들이 속죄제물의 대속적인 피를 통해 용서함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속죄소를 가리켜 “내가 너와 만날 곳”(출 30:6)이라고 하셨으며, 여러 성막 기구들 중에 제일 먼저 지시하셨던 것입니다.

  신약 성도가 교회를 통해 반드시 체험해야 할 필수적 은혜 역시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보혈로써 주어진 속죄’입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볼 때 실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두 다 ‘사망의 저주 아래에 있는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속죄소’로써 덮어 주십니다.
  이제는 양의 피가 아니라 바로 그 ‘독생자의 보혈’을 뿌려 주심으로써 우리는 모든 죄에서 깨끗이 용서함 받는 놀라운 은혜를 바로 이 ‘시은소’에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법궤와 속죄소가 성막의 가장 안쪽의 지성소에 안치된 것처럼, 속죄 은총이야말로 성도가 교회를 통하여 각자의 심령 속에 가장 깊이 간직해야 할 최고의 은혜임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도는 교회를 통하여 ‘구원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마음’을 항상 지켜야 합니다.

  10절부터 16절에 기록하기를 “10그가 또 조각목으로 상을 만들었으니 길이가 두 규빗, 너비가 한 규빗, 높이가 한 규빗 반이며 11순금으로 싸고 위쪽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금 테를 둘렀으며 12그 주위에 손바닥 넓이만한 턱을 만들고 그 턱 주위에 금으로 테를 만들었고 13상을 위하여 금 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네 발 위, 네 모퉁이에 달았으니 14그 고리가 턱 곁에 있어서 상을 메는 채를 꿰게 하였으며 15또 조각목으로 상 멜 채를 만들어 금으로 쌌으며 16상 위의 기구 곧 대접과 숟가락과 잔과 따르는 병을 순금으로 만들었더라”고 했습니다.

  이 “상”은 물론 정교하게 장식은 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일종의 밥상과도 같은 모양의 기구였습니다.
  그리고 그 상 위에는 ‘진설병’을 담는 “대접”과 향을 담아 놓을 때 쓰인 “숟가락”, 그리고 포도주를 위한 “잔” “병”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가 다 ‘사람이 하나님께 바치는 것’들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진설병’은 이른바 ‘얼굴의 떡’으로서 ‘하나님의 존전에 항상 차려져 있어야 하는 떡’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열두 덩이의 떡이 여섯 개씩 두 줄로 상위에 배열되었으며, 한시도 그 위에 떡이 비워져 있는 때가 없도록 매주 새 떡으로 바꾸어 차려졌습니다.

  이 진설병은 ‘그리스도의 살’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그보다는 ‘성도 편에서 하나님께 항상 올리는 감사’를 뜻하는 것으로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진설병이 ‘열두 덩이씩’ 차려진 것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것이 분명하며, 그런 맥락에서 볼 때 그 떡은 ‘하나님의 선민에 속한 성도’라면 당연히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삶이 매일 지속되어야 함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훨씬 더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속죄 은총이 지성소의 ‘법궤와 시은소’를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성도에게 계속 부어지고 있다면, 성도 편에서 역시 하나님께 ‘진설병의 상’을 통해 날마다 감사드리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서로 아주 잘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당연히 ‘감사’의 반응을 하나님께 나타내어야 하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가장 기본적인 ‘영적 교통’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은혜를 이미 체험하고 있는 성도답게 바로 그에 대한 감사 역시 하루도 빠짐없이 그 몸된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 올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성도는 교회를 통하여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17절부터 24절에 “17그가 또 순금으로 등잔대를 만들되 그것을 쳐서 만들었으니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이 그것과 한 덩이로 되었고 18가지 여섯이 그 곁에서 나왔으니 곧 등잔대의 세 가지는 저쪽으로 나왔고 등잔대의 세 가지는 이쪽으로 나왔으며 19이쪽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고 저쪽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어 등잔대에서 나온 가지 여섯이 그러하며 20등잔대 줄기에는 살구꽃 형상의 잔 넷과 꽃받침과 꽃이 있고 21등잔대에서 나온 가지 여섯을 위하여는 꽃받침이 있게 하였으되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였고 또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였고 또 다시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되게 하였으니 22이 꽃받침과 가지들을 줄기와 연결하여 전부를 순금으로 쳐서 만들었으며 23등잔 일곱과 그 불 집게와 불 똥 그릇을 순금으로 만들었으니 24등잔대와 그 모든 기구는 순금 한 달란트로 만들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등잔대” 역시 매우 자세한 설명이 붙어 있지만, 간단히 요약하자면 기본적으로 중앙의 한 가지를 중심으로 좌우 세 개씩 총 일곱 개의 가지로 구성되었고 각 가지의 꼭대기마다 “등잔”이 있어서 불을 붙일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진설병의 상’에 항상 떡이 바쳐진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 일곱 개의 등잔불 역시 ‘끊이지 않고 타오르도록’ 늘 간수되어야 했습니다.

  이 ‘등잔대의 불’이 곧 ‘성령의 조명’을 상징한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스가랴서 4장에 나타나는 등잔대의 이상이라든지, 요한계시록 4장 5절의 “보좌 앞에 켠 일곱 등불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는 말씀 등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일곱’이란 수는 성경에서 대표적인 ‘완전수’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조금의 착오도 있을 수 없는 완벽한 것이며, 그러니 성도는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만을 따라 살면 실로 완전한 금세와 내세의 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막의 등잔불이 결코 꺼져서는 안 되었던 것처럼, 성도는 한시도 빠짐없이 오로지 성령의 인도하심만을 따라 살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성령님의 조명은 바로 성도가 신구약 성경을 읽고 들을 때에 그 말씀을 깨닫고 지켜 따르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당하든지 바로 그런 경우에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을 성경 말씀이 가르치는 그대로 즉시 따라갈 줄 아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성도가 성령의 비춰 주시는 빛 아래 인도하심을 받는 실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비록 ‘등잔대’는 없어도 이처럼 ‘완전한 일곱 영’의 지혜와 능력으로써 여전히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반드시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성도는 교회를 통하여 ‘늘 깨어서 기도하는 생활’을 부단히 지속해야 합니다.

  25절부터 29절의 말씀에 “25그가 또 조각목으로 분향할 제단을 만들었으니 길이는 한 규빗이요 너비도 한 규빗이라 네모가 반듯하고 높이는 두 규빗이며 그 뿔들이 제단과 연결되었으며 26제단 상면과 전후 좌우면과 그 뿔을 순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 테를 둘렀고 27그 테 아래 양쪽에 금 고리 둘을 만들었으되 곧 그 양쪽에 만들어 제단을 메는 채를 꿰게 하였으며 28조각목으로 그 채를 만들어 금으로 쌌으며 29거룩한 관유와 향품으로 정결한 향을 만들었으되 향을 만드는 법대로 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분향할 제단” 즉 ‘분향단’은 진설병의 상과 등잔대와 마찬가지로 지성소 바깥쪽의 성소 안에 두었던 기구인데, 특히 이것은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 바로 앞에 비치되었습니다.
  그래서 분향단 자체는 성소에 속한 것이지만 ‘지성소에 속한 성물’로 취급되기도 했습니다.
  이 분향단에서는 아침저녁으로 향을 태워 올려야만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향도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출 30:8)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이 향은 ‘성도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대표적으로 요한계시록 5장 8절에 보면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했으며, 8장 4절에도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향을 드리는 분향단이 법궤가 있는 지성소 휘장 바로 바깥쪽의 성소에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지성소 안에는 십계명 돌판을 담은 궤가 있었고 거기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분향단이 있었다는 사실은 바로 ‘말씀’과 ‘기도’란 실로 밀접한 상관관계에 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를 통하여 받는 ‘하나님의 말씀’의 양을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의 양과 비교해 본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자신이 올리는 기도의 분량이 주일오전예배 시간에 듣는 설교 말씀의 분량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라면, 그 교인의 향은 자주, 아니 어쩌면 대부분의 시간 동안 꺼져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막 11:17)고 천명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교회에 모일 때마다 신구약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늘 말씀해 주시듯이 이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 저 천상보좌를 향하여 각자가 피우는 ‘기도의 향’을 항상 올려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 성도는 교회를 통하여 ‘정성껏 준비한 온전한 예물’을 기쁘게 바쳐야 합니다.

  38장 1절 이하 7절에 기록하기를 “1그가 또 조각목으로 번제단을 만들었으니 길이는 다섯 규빗이요 너비도 다섯 규빗이라 네모가 반듯하고 높이는 세 규빗이며 2그 네 모퉁이 위에 그 뿔을 만들되 그 뿔을 제단과 연결하게 하고 제단을 놋으로 쌌으며 3제단의 모든 기구 곧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을 다 놋으로 만들고 4제단을 위하여 놋 그물을 만들어 제단 주위 가장자리 아래에 두되 제단 절반에 오르게 하고 5그 놋 그물 네 모퉁이에 채를 꿸 고리 넷을 부어 만들었으며 6채를 조각목으로 만들어 놋으로 싸고 7제단 양쪽 고리에 그 채를 꿰어 메게 하였으며 제단은 널판으로 속이 비게 만들었더라”고 했습니다.

  이 “번제단”은 두말할 필요 없이 각종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만든 것이었습니다.
  제물을 그 위에서 태워야만 했기 때문에 이것은 성막 안이 아니라 그 바깥뜰에 안치되었습니다.
  그래서 번제단은 성막 안에는 들어갈 수 없었던 백성들이 제사장과 직접 만나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특별한 목적들 때문에 성막 바깥에 두기는 했지만 그 중요성에 있어서는 번제단 역시 성막 안의 다른 기구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음에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년 정한 절기와 성일에 반드시 ‘성막’으로 나아와서 당신께 ‘얼굴을 보여야’ 할 뿐 아니라 그때마다 절대로 “빈 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출 34:20)고 아예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명령을 순종하여 바로 이 번제단에서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서원제, 낙헌제’ 등 각종 제물을 ‘화제’로 즉 ‘불에 태워 바치는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약 성도도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모일 때마다 꼭 하나님께 바칠 예물을 미리 준비해서 나아와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통해 말씀을 듣고 기도를 올리며 사죄의 은총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누리면서 늘 감사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제단을 통해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는 것 역시 필수적인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번제단이 비록 성막 바깥뜰에 있었다 할지라도 역시 성막의 기물에 속했듯이, 그 순서가 비록 뒷부분에 있다 해도 헌금 역시 예배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제사장과 백성이 번제단에서 함께 만났듯이, 헌금 또한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나 교인들 모두가 다 정성과 힘을 다해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제물이 타오르지 않는 번제단이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면서, 교회의 제단을 통해서도 십일조와 감사헌금과 서원헌금을 비롯하여 각종 예물을 하나님께서 향기롭게 열납하실 제물로 늘 올려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6. 성도는 교회를 통하여 ‘신자다운 경건 생활’에서 계속 진보해 나가야 합니다.

  38장 8절 본문에 “8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물두멍”이란 번제단과 함께 성막 뜰에 비치된 일종의 세숫대야와 같은 ‘놋대야’를 가리킵니다.
  이 물그릇은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러 나가기 전에 그들의 손을 씻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특별히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 즉 그녀들이 사용하던 놋거울을 모아 녹여서 만들었는데, 그 당시의 놋거울은 상당한 귀중품에 해당되었으므로 그 여인들의 정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0장 20절과 2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이 만약 물두멍에서 손을 씻는 정결의 준비과정 없이 성막에 들어가면 ‘죽을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앞에 나왔던 성막의 기구들과 비교할 때 일견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이 놋대야가 바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정결한 몸과 마음의 자세가 없이 제단에 올라가는 것은 스스로 사지로 들어가는 것과 진배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겉으로는 교회에 출석하고 예배에 참석한다 해도 자신의 심령과 생활 속에서 ‘경건’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 영혼은 실로 ‘산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죽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정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를 믿고 죄 사함과 구원의 확신이 있는 성도라면 바로 경건생활을 통해 점점 더 성화되어 가는 것이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그리고 참된 경건생활은 자기 혼자서 무슨 참선이나 도를 닦는다든지 덕을 쌓는다든지 해서가 아니라 이것 역시 오직 철저하게 교회중심으로 살아야만 진보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밖은 여전히 ‘죄악이 관영한 장망성’이며 ‘할 수만 있다면 택자까지 미혹하려는 마귀’가 곳곳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그래도 교회에 나오게 되면 예배시간 전이나 묵도 시간에 잠깐이나마 회개 기도를 올리면서 자신을 다시 한 번 더 정결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놋대야’에 손을 씻을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이 교회를 통해 각자의 경건생활에서도 진보를 보임으로써 성화의 완성 곧 ‘영화’에까지 꼭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든 ‘성막의 기구’들과 또 ‘성막’과 그것을 세우는 ‘구조물’을 만들 때 그 모든 것들을 ‘운반’에 편리하도록 설계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광야생활 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를 가든지 그 성막을 모시고 다니기 쉽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언제 어디서든지 그들의 삶은 오로지 성막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성막중심 신앙생활’이나 신약의 ‘교회중심 신앙생활’은 근본적으로는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둘 다 한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해 놓으신 ‘식양’대로 세워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예배당 안에는 그 많던 성막의 기구들 중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귀중한 의미를 부여하셨고 나중에 솔로몬의 성전 안에도 똑같이 비치되었던 ‘성막의 인테리어’를 왜 신약의 교회 건물 안에는 단 하나도 남겨 두지 않으셨겠습니까?

  그것은 그 ‘성막’이 오늘에 와서는 ‘예배당’이 아니라 바로 ‘신자의 몸’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각자의 몸이 그대로 ‘성령의 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새로운 성전 안에도 옛날 성막 안에 두었던 기구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안치되어 있기를 오늘도 바라시지 않겠습니까?
  아무 ‘거룩한 기구’가 없는 성막이란 한산하다 못해 실로 처량하고 쓸쓸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처럼, 이 ‘영적 인테리어’를 갖추지 못한 신자란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은 성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속죄의 은총을 뜨겁게 체험하는 심령,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마음, 성령의 조명 가운데 성경 말씀을 통해 깨닫는 지혜, 항상 기도의 등잔에 기름을 채우고 불을 밝히는 영성, 예배를 드리러 나아올 때마다 그 손에 정성껏 준비한 예물, 금세와 내세에 유익한 경건생활의 비밀 - 이런 ‘속사람’을 채워야만 우리 각자는 진정 ‘아름다운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올해도 이 경향교회를 출입하며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이처럼 하나님께서 바로 이 교회를 통해 내려 주시는 온갖 은혜들로써 자신의 ‘심령의 성전’을 실로 아름답게 꾸미고 채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