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6-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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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6-01-17
2016′경향의 강단(4) (2016년 1월 17일 / 주일 대예배)
“언약에 인을 치는 자” 느헤미야 9장 38절 – 10장 39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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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에 인을 치는 자"

느헤미야 9장 38절 – 10장 39절/ 석기현 담임목사
여러분 가운데 저와 비슷한 세대의 교우님들은 ‘국민교육헌장’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국민학교’ 즉 요즘의 초등학교 5학년이었을 때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꽤 긴 헌장이었지만 당시의 학생들은 그것을 달달 외우고 있어야 했습니다.
  덕분에 저는 아직도 그것을 암기하고 있는데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내용이었습니다.

  헌장이란 이처럼 ‘어떤 이상적인 원칙이나 각오를 확인해 주는 지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루살렘 성벽 재건공사를 끝낸 후 민족 대각성 성회를 모였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런 헌장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본문 9장 38절에 “38우리가 이 모든 일을 인하여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을 치나이다 하였느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8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문 앞 광장’에 모여 초막절 집회를 거행하면서 레위인들이 낭독해 주는 ‘모세의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9장 앞부분에 보면 그것만으로 끝내지 않고 특별회개 집회를 열고서 앞으로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각오를 다졌었는데, 그 결과 이제 “견고한 언약” 즉 일종의 ‘신앙생활헌장’을 제정하고 거기에다 도장까지 찍으면서 철저하게 서원했던 것이었습니다.

  본문 10장 1절부터 27절에는 그렇게 ‘언약’을 세우고 ‘인’을 친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일 처음으로 지도자인 “느헤미야” 총독이 나오고 이어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그리고 “백성의 두목들”의 이름들이 이어집니다.
  비록 그 언약에 직접 인을 친 사람들은 이 대표자들이었지만, 28절 이하에 보면 “그 남은 백성”“문지기들”“노래하는 자들”“느디님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모든 자와 그 아내와 그 자녀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다 똑같은 마음으로 이 서약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세웠던 “견고한 언약”의 근거는 10장 29절 하반절에 있는 대로 “계명과 규례와 율례”가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율법”이었습니다.
  신자가 어떤 원칙이나 서원을 세운다면 당연히 ‘신앙과 행위의 유일무이한 규범’인 ‘하나님의 말씀’에만 기초해야 할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운 ‘신앙생활헌장’은 진정 성경중심으로 사는 신자라면 필수적으로 나타내야 할 ‘신행일치’의 삶을 실로 일목요연하게 일깨워 주는 아주 멋진 헌장이 되었습니다.

  이 시간 저는 바로 그 이스라엘 백성의 ‘견고한 언약’을 통하여 예나 지금이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신앙인이 반드시 명심하고 지켜야 할 사실 두 가지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경중심으로 사는 신자는 먼저 밖으로 ‘불신자와 성별된 경건생활’을 뚜렷이 보여 주어야 합니다.

  본문 10장 28절부터 31절에 “28그 남은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및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모든 자와 그 아내와 그 자녀들 무릇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가 29다 그 형제 귀인들을 좇아 저주로 맹세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종 모세로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좇아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30우리 딸은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 아들을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며 31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화나 식물을 가져다가 팔려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사지 않겠고 제 칠년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 하였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신앙의 이방민족들과 명백히 구별되는 선민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열거하면서 ‘견고한 언약’을 세웠습니다.
  그 첫째는 곧 ‘불신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언약이었습니다.
  30절에서 “우리 딸은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 아들을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며”라고 맹세한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이방 족속들과의 통혼이 결국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우상숭배에 빠지게 만드는 첩경이 된 것은 과거 역사에서도 뚜렷이 나타났던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에서 포로해방을 받고 유다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도 여전히 그런 불신결혼의 유혹에 빠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폐허나 다름없는 유다 땅에 이제 막 정착하기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그 주변에서 이미 든든한 사회적 배경과 여건을 갖추고 있던 이방 민족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불안한 생활을 단번에 호전시키는 방편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오직 ‘하나님의 율법’이 명하는 대로 살기로 서원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무엇보다도 이 불신결혼부터 철저하게 배격함으로써 이방민족들과 근본적으로 성별된 영적 순수성을 지키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두 번째 ‘성별 서약’은 바로 ‘안식일 성수’였습니다.
  31절 상반절에 “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화나 식물을 가져다가 팔려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사지 않겠고”라고 맹세했던 것입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고 거룩히 지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다 기본적으로 잘 알고 지키고 있던 계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들은 그런 안식일 성수를 자기네 스스로만 잘 지키는 데서 끝내지 않고 “이 땅 백성” 즉 이방민족의 백성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도 보여 주겠다고 서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거래처나 고객이라 할지라도 안식일에는 그들과 그 어떤 상업적인 거래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 불신 민족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성별생활을 분명히 나타내겠다는 각오였습니다.

  생업의 현장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인 고유의 성별생활을 지키기로 서약한 대상이었습니다.
  바로 31절 하반절에 “제 칠년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 하였고”라고 기록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7년에 한 번씩 땅을 경작하지 않고 쉬게 하는 ‘안식년’은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리신 명령이었습니다.
  단기적으로만 보면 일 년 동안 휴경지로 비워 두는 것이 손해가 될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에는 그렇게 해야 토지의 영양분이 재충전되면서 훨씬 더 생산성을 높일 수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칠 년에 한 번씩 ‘채무 탕감’을 해 주는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가 받을 수 있는 빚을 그냥 포기하는 것이니까 현실적으로는 분명히 금전적 손해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신용불량자’들이나 ‘파산’했던 사람도 재기의 기회를 얻을 수가 있었고, 바로 그런 개인적인 희생이 이스라엘 사회 전체를 훨씬 더 탄탄하게 안정시키는 효과를 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세 가지 구체적인 서약을 통해 그들이 불신앙의 이방민족들과 어떻게 다른, 어떻게 ‘거룩하게 구별된 선민’인지를 뚜렷이 보여 주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참된 신자라면 이처럼 불신자와 명백하게 구별되는 ‘성별’의 생활을 나타낼 줄 알아야 합니다.
  결혼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기독신자는 아니지만 다른 ‘스펙’들은 너무나 좋아 보이는 배우자 후보를 만나게 될 때 오늘날의 기독청년들도 옛날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은 망설임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경우야말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후 6:14상)는 하나님의 말씀만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일단 전도해서 세례까지 받게 한 후에 결혼을 해야 하고, 만약 끝까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그 상대방은 결코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시는 배우자’가 아닌 줄로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신자의 성별생활은 주일성수에서도 분명히 나타나야 합니다.
  거래처 사람에게 자신은 주일에 그 어떤 비즈니스 미팅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평소부터 확실히 인식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런 자세가 바로 불신사회에 대한 ‘신앙인의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게는 주일에 문을 닫습니다.”라고 간단한 안내문 하나만 붙여 놓으면 단골고객이 헛걸음을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또한 ‘일요일’이라는 말 대신에 ‘주일’이라고 써 붙인 그 단어 하나만으로도 ‘이 가게의 주인은 기독신자구나.’라는 사실을 그 누구라도 명백히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직장생활이나 금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돈만 벌겠다고 눈이 벌개져서 일주일 내내 휴일 하루도 없이 일하다가 건강을 잃고 마는 불신자들과는 달리 쉴 때는 쉬고 일할 때 더 열심히 일을 해서 능률을 올리는 모습을 기독신자들이 보여 줄 줄 알아야 합니다.
  걸핏하면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 사이에 소송까지 하면서 ‘자기 권리’를 악착같이 챙기겠다는 각박한 현대인들과는 달리 개인적으로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너그러운 마음과 베푸는 손길을 발휘할 줄 아는 것이 적어도 ‘하나님의 자녀’ 된 자라면 당연히 발휘해야 할 미덕인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진심으로 자신의 ‘신앙과 생활의 유일무이한 규범’으로 믿고 따르는 기독신자라면 이런 정도는 불신자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인간적인 친분의 관계는 유지하면서 전도의 손길은 부지런히 내밀어야 하지만 불신자와 명백히 구별되어야 할 자리에서는 이런 ‘성별의 선’을 확실히 긋고 살아야만 합니다.
  진정 ‘성경중심’으로 사는 신앙인답게 ‘내가 예수님을 믿는 기독신자라는 사실이 불신자들 앞에서 똑똑히 나타나도록 살겠다.’는 경건생활의 각오를 자신의 ‘신앙생활헌장’에 꼭 기록하고 ‘인을 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경중심으로 사는 신자는 또한 안으로 ‘교회를 위한 헌신의 서원’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10장 32절 이하 39절에 기록하기를 “32우리가 또 스스로 규례를 정하기를 해마다 각기 세겔의 삼분 일을 수납하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쓰게 하되 33곧 진설병과 항상 드리는 소제와 항상 드리는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에 쓸 것과 성물과 이스라엘을 위하는 속죄제와 우리 하나님의 전의 모든 일을 위하여 쓰게 하였고 34또 우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들이 제비 뽑아 각기 종족대로 해마다 정한 기한에 나무를 우리 하나님의 전에 드려서 율법에 기록한 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단에 사르게 하였고 35해마다 우리 토지 소산의 맏물과 각종 과목의 첫 열매를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로 하였고 36또 우리의 맏아들들과 생축의 처음 난 것과 우양의 처음 난 것을 율법에 기록된 대로 우리 하나님의 전으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주고 37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에 두고 또 우리 물산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물산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 38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하나가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 곧 곳간에 두되 39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기명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및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을 친 견고한 언약’의 두 번째 내용은 각종 ‘헌금생활’에 대한 서원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실로 온갖 종목의 헌금들이 자세하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먼저 32절과 33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일정한 ‘성전세’를 드리기로 작정했는데 이것은 성전의 특별 행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항상” 필요한 지출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진설병”은 항상 성전에 차려져 있는 떡이며, 뒤이어 언급되는 것들도 “항상 드리는 소제”“항상 드리는 번제”이며, 그 외에도 “정기적으로 있는 절기”들을 위해 필요한 비용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용어를 빌리자면 곧 교회의 ‘경상비’에 해당됩니다.
  특별한 사업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유지되기 위하여 항상 필요한 교역자 사례, 직원 월급, 주일학교 교육비, 건물 관리비, 차량 연료비 따위인데, 유다 백성들도 그와 같은 성전 경상비 집행에 조금이라도 차질이 없게 하기 위하여 그처럼 ‘성전세’를 작정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34절에는 성전의 단에 필요한 “나무”를 바치기로 서약하고 있는데, 율법에 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라는 규정은 있어도 백성들이 개인적으로 나무를 성전에 바치라는 규정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전에 늘 필요한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위하여서도 또 ‘제비 뽑아 각기 종족대로’ 즉 순번을 정해 두고 바쳤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식사 친교나 강단꽃 준비 등을 위하여 순번을 정해 두고 섬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35절 이하 37절 상반절에 보면 “맏물” 혹은 “처음 난 것”을 바치기로 했습니다.
  여기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처음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내용인데, 이것은 ‘가장 좋은 것’을 가리킵니다.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자기가 먼저 즐기는 것은 실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위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어떤 좋은 일이 있을 때 제일 먼저 하나님께 ‘감사헌금’을 바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 감사의 제물은 당연히 ‘처음 난 것’ 즉 ‘가장 좋은 것’으로 드려야 하며, 자기가 먼저 쓸 것 다 쓴 후에 ‘남은 것’으로 체면치레하는 것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헌금생활의 가장 기본인 십일조 또한 빼놓았을 리가 없는데, 바로 37절 하반절에서 39절 상반절까지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본문에 보면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 “아론의 제사장 하나가 함께 있을 것”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바로 헌금을 훔치는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못하도록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헌금을 계수할 때에는 반드시 ‘두 명 이상’의 헌금위윈이 함께 있어야 하며 원칙적으로 ‘재정부장 장로’의 감독 하에 진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십일조의 주요 용도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생활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교역자로 하여금 생계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보장해 주어야 함을 상기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교역자에게 기본 생활비조차 드리지 않거나 꼭 필요한 교역자의 숫자를 줄여서 남긴 예산을 가지고 ‘성전 건축’이나 ‘선교 사업’에 사용하겠다는 것은 참으로 옹졸한 발상인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다른 모든 종류의 헌금들은 전적으로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이지만 십일조만큼은 ‘의무적’으로 드려야 할 유일한 헌금입니다.
  지금 막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끝내고 고국에 돌아와서 동전 한 닢이 아쉬운 유다 백성들도 준행했던 십일조라면, 오늘날 이 평화시대의 현대사회에서 그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물질생활의 축복을 누리고 있는 우리는 더욱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성전을 위하여 헌신할 것을 서약하고 그것을 지킨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39절 상반절에 보면 그 모든 각종 제물들이 “성소의 기명을 두는 골방”에 보관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골방’이라고 번역된 말은 ‘작은 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전 안에서도 구별된 ‘큰 방’으로서 ‘곳간’과 같은 장소였습니다.
  즉 그들이 바친 헌물은 하나님의 성전에서도 특별히 지정된 가장 귀한 곳에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위한 특별헌금을 온 힘을 다해 바쳤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그 일이 끝난 직후에 또한 이처럼 성전을 위하여 갖가지 헌금생활에 충성하기로 굳게 맹세했습니다.
  더구나 그 많은 종류의 헌금들은 어디까지나 백성들 편에서 “스스로 규례를 정하여” 작정한 ‘자원헌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유다 백성들은 다 한마음으로 크게 부끄럽게 여기며 통분히 뉘우치는 사실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곧 39절 하반절에 기록된 말씀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생활 이전 그들의 조상 시절에 성전에 대하여 얼마나 무관심했었는지를 뼈아프게 뉘우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전을 다시는 버리지 않겠다.’는 이 말은, 이제 그들이 성전을 ‘섬겨야 할 헌신봉사의 대상’으로 재삼 자각하면서 다시는 이전처럼 성전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망각하거나 회피하지 않겠다는 단단한 각오였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적지 않은 교인들이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의 재정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한 것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살림을 두고 하나님의 백성 된 교인들이 책임의식을 가지고서 의무수행을 하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하겠습니까?
  불신자들이 대신 나서서 걱정해 주겠습니까?
  교회의 경상비가 예산에 미달할 때 그 교회의 제직들조차 그 사실을 두고 부끄럽게 여기면서 더욱 자신의 기본의무를 감당하려고 애쓰기는커녕 아예 제직회에 참석도 하지 않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슨 지자체에서 ‘복지예산’을 교회로 돌려주겠습니까?

  일단 십일조는 적어도 진실한 기독신자라면 당연히 기본적으로 바쳐야 할 기본의무라는 사실은 이러쿵저러쿵 설명을 달 필요조차 없습니다.
  성경 곳곳에서 분명히 명령하고 있는 것을 제쳐놓고라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누구나 다 바친 것인데 그들보다 훨씬 더 큰 은혜와 축복의 시대를 살고 있는 신약의 성도들이 도대체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다고 십일조를 못하겠습니까?
  나머지 헌금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사이에서 예의상 서로 주고받는 것만 생각해 보더라도,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들에 대하여 항상 가장 좋은 것으로 ‘감사헌금’을 드리는 것은 정말 당연지사가 아니겠습니까?
  내 집 사고 가꾸는 정성의 반의반만 있어도, 우리가 헌당과 교육관을 위하여 ‘생애 최고와 전부의 특별헌금’을 드리고 ‘보리떡 헌금’까지 작정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부담이 될 리는 없습니다.
  이웃사회 전도와 세계 선교라는 이 선한 일들이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유언처럼 남기신 유일한 명령인 줄을 안다면, 이런 선한 일을 위하여 ‘3대 후원회비’를 내는 것을 두고 어떻게 ‘목사가 돈을 더 많이 거두기 위하여 만들어 낸 헌금’이라고 함부로 악평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재물이 교회에 헌금으로 바쳐져서 하나님의 선한 사업을 위해 쓰이는 것보다 더 값있게 사용될 수 있는 곳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고려신학교 대학원 인수를 위해서 일이 년만 빌려 쓰게 해 주면 이자까지 꼭 계산해서 갚겠다고 담임목사가 약속을 하는데도 그냥 집안 장롱에다 현찰을 꼭꼭 숨겨 두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도둑한테 좋은 일 해 주는 꼴만 될 것입니다.
  이제 조금만 더 힘을 모으면 헌당과 헌관을 완전히 끝낼 수 있는 결승점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끝까지 ‘보리떡 헌금’에는 인색하고 은행에 차곡차곡 저금하는 재미로 살고 계십니까?
  죽을 때 본인은 단 한 푼도 가져가지 못하고, 자식들은 그 유산 서로 더 많이 가지겠다고 법정소송을 벌이게 될 것입니다.

  오직 교회야말로 우리의 물질이 가장 귀하게 쓰일 수 있는 ‘성전의 곳간’입니다.
  헌금이야말로 우리의 재물을 ‘마땅히 쌓아 두어야 할 하늘창고’에 쌓는 최고의 투자인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신앙인이라면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는 서원 또한 자신의 신앙생활헌장에 반드시 있어야 함을 명심하면서, 교회를 위한 각종 봉사와 헌금생활의 헌신을 오직 기쁨과 감사로써 준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 10장 29절 상반절을 다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신앙생활헌장’을 굳게 지킬 것을 “저주로 맹세”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 서약을 지키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내리실 저주까지 달게 받겠다는 의미로서 그들의 각오가 그 얼마나 결연한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 제가 만약 이 서원을 지키지 않으면 제게 큰 벌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기도해 본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 ‘신앙생활헌장’에 ‘인을 치면서’ 서약하고 있는 자세입니다.
  기독신자가 밖으로는 ‘신자다운 성별생활’을 나타내야 하고 안으로는 ‘교회를 위한 헌신적인 봉사와 충성’을 발휘해야 하는 것은 그만큼 지극히 당연한 일인 동시에 필수적인 기본의무인 것입니다.

  지난 송구영신예배 때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가 두 번째로 지켜야 할 자세는 바로 ‘성경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다짐했었습니다.
  경향교회에도 역시 오직 성경 말씀만이 우리가 계속 이어가야 할 ‘이스라엘의 전례’이며 경향교회의 당회는 바로 오직 성경이 가르치고 명하는 그대로 교회를 관할하고 치리하는 ‘판단의 보좌’인 것입니다.
  그처럼 그 ‘성경중심, 교회중심’의 신앙생활 원리를 자신의 양심으로 따르고 지키는 신자라면 그것이 반드시 ‘신행일치’의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웠던 ‘견고한 언약’에 기록된 두 가지 맹세인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 ‘신앙생활헌장’에 각자 ‘양심의 인’을 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불신자들 앞에서 신자답게 거룩한 경건생활을 나타내겠습니다.
 ’라는 각오와 ‘내가 이 경향교회를 다시는 결코 저버리지 않고 지사충성하겠습니다.
 ’라는 결단을 굳게 세우고 그대로 준행함으로써 이 2016년을 통해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의 형통’을 꼭 함께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